1270년 6월.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다. 멀고 먼 강화도에서 벌어진 일은 탐라국을 뒤흔들었다.무신정권이 마침내 무너지고 개경으로 고려정부가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말하자면 초개와 같이 버려졌다. 초개란 제사에서 신의 모형으로 만들어 받들어지지만 제의가 끝나면 버려져서 아무나 짓밟는 존재란 뜻이다. 고려 유일의 엘리트 군사집단으로서의 자부심이 땅바닥에 떨어졌으니 고려정부가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해체할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대몽항쟁의 유일한 정예군으로서 탄력을 받아 나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결과는 역사가 알려주는 것과 같다.
1267년 1월 26일. 원나라 대도(베이징)는 정초라 세계 각국에서 오는 수많은 사절단들로 붐볐다. 그 가운데 탐라국 사람 양호가 있었다. 양호는 원나라 세조를 만났다.원나라 세조는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정복한 나라 쿠빌라이 칸이다. 이날의 일을 원나라 역사인 는 이렇게 적고 있다.백제가 그 신하 양호를 보내서 입조하니, 수놓은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양호는 탐라국을 떠난 후 먼저 강화도에 들어가서 왕을 알현했다. 그리고 다시 50일간의 여행 끝에 대도에 도착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 고려사는 이렇게 썼다.1266년
조선 숙종 때인 1702년에 나이 쉰, 지천명에 이른 이형상이 한양을 출발해 한달여를 여행한 끝에 당도한 곳은 제주였다. 알아듣기 힘든 언어, 깔그락한 밥, 미친 듯이 불어대는 습한 바람, 그런 건 참을만했다. 변방의 수령으로 가란 임금의 교지를 받들었을 때 각오한 일이니까 말이다.이형상을 힘들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도대체 같은 조선의 백성인가 싶었다. 모든 게 달랐다. 뱀을 모시질 않나,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질 않나 동성동본끼리 결혼하질 않나, 벌거벗고 물질을 하지 않나. 게다가 굿판은 미어지는데 서당이나 향교의 마당엔
조선시대에 제주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형벌에 가까웠다. 제주는 섬이라 직접세인 토지세가 없는 대신에 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다른 공물은 국가재정이라 흉년이나 천재지변에는 깎아주기도 했고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는 돈이나 쌀, 옷감으로 납부하면 되었다.하지만 진상은 왕실재정이라 꿈쩍도 안했다. 제주는 마치 점령지와 같았고 진상이 진상을 떠는 곳이 되었다.제주사람들이 왕실에 진상해야 할 품목은 귤, 해산물, 약재, 말, 흑우, 육포처럼 대부분 제주특산물들이어서 대체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제주에서 한양까지 거리는 빨라야 한 달이 걸렸
한라산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썼을까? 고대사서에는 한라산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본토의 입장에서 제주는 외국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행정단위가 된 숙종 때로부터도 거의 200년이 지나서야 요즘 말로 ‘셀럽’인 사람이 찾아왔고, 비로소 한라산이란 말이 등장한다.한라라는 이름을 처음 등장시킨 셀럽은 대략 1300년을 전후로 제주에서 활동한 혜일이란 승려였다. 혜일은 ‘한라의 높이는 몇 길이던가…’로 시작하는 시를 남겼다.에는 1374년 최영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에 들어와 '모든 장수들이 한라산 아
2005년 제주 동쪽 마을인 월정리에서 전신주 교체 공사를 하던 한전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감쪽같이 전신주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자그마한 사고 하나가 놀랄만한 일을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그 전신주가 빠진 구멍 때문에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하나가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동굴이 용천동굴이다.유네스코는 1972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보호협약'을 채택하고, 인류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문화와 자연이 특별히 뛰어난 지역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시작하였다. 2001년부터 정부와 제주도는 화산섬 제주
제주 어딜가나 돌담을 보게 된다. 제주의 돌담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규칙도 없으며 무한한 곡선의 향연이다. 제주의 아름다운 색채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흑룡만리’라는 멋진 이름이 있다. 까만 용이 1만 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어떤 이들은 불멍 바다멍처럼 하나의 힐링용어으로서 '돌담멍'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무질서해 보이는 제주 돌담은 자연재해가 강력한 제주에서도 어지간해선 무너지지 않는다.'그렝이 공법'이라는 한국의 전통건축기법으로 지어 태풍에도 끄떡없다. 돌들을 반
구 한말 제주에 유배 와서 이재수의 난을 직접 목격한 김윤식은 제주 읍성을 포위한 난군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에 앞장서는 제주 여성들을 보면서 남자들 저리가라하는 드센 여자들에 대해 한마디 말을 남기기도 했다.‘본디 악하고 사나워 싸우기를 좋아하여 남자들도 두들겨 패는 사람들이었다.’제주 여성이 전부 사나울 리는 없지만 강인한 쎈언니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있었다.유교적 가치관에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근간인 군대, 노동, 세금을 담당하고 관직을 독점하는 일이 제주에선 불가능 했다. 물론 관직에선 소외되었지만 군대, 노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의 또 다른 이력은 제주도 연구가이다. 그것도 그냥 연구가가 아니라 제주도학이란 개념을 새롭게 만들어낸 지금의 제주학의 선구자이다. 제주 민요 오돌또기를 최초로 채록해서 세상에 알렸고 후렴구인 ‘둥구레당실 둥구레당실’을 늘 흥얼거리며 스스로를 반(半)제주인이라고 말할 만큼 제주를 사랑했다. 평양출신의 나비학자가 어쩌다 제주에 푹 빠지게 된 것일까.석주명은 1908년 평양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에는 만돌린(후에 기타)을 연주하고 뮤지컬 공연도 하는 등 음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재능의 한계를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지 불과 2년 후인 1813년 12월 3일, 서북지방과는 수만리 떨어진 제주에서 하마터면 다시 반란이 벌어질 뻔했다는 제주목사 김수기의 장계(보고서)가 도착했을 때만해도, 미리 그 무리를 잡아서 찍어 누른 일에 대해 조선정부는 매우 흡족해했다.장계에 따르면 무리의 주모자인 양제해는 발칙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과거 탐라국을 세운 양을나의 후손인 자신이 홍경래의 난에 자극을 받아 관리들의 횡포와 무거운 세금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삼별초의 난에서 김통정이 했던 것처럼 제주에 별국을 건설하겠다고 했으니 말이다.조
연인원 1만7130명이 참여하고 238회에 이르는 집회와 시위를 거듭한 결과 승리를 따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비천한 신분에서 경제의 주역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일이 일제 강점기에 그것도 여성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이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들이 제주 해녀들이다. 3.1운동으로 시작되어 1920년대를 휩쓸고 간 항일운동이 잦아들 무렵인 1932년에 여성들만의 힘으로 가장 완벽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면서 이겼고, 그로인해 자신과 가족들은 물론 제주도의 경제지도도 바꿨다.그들이 벌인 해녀
예전에 육지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딸이 결혼적령기가 될 정도인 15년 정도가 지나면 가구를 만들기 딱 좋은 크기로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동나무는 마당이 넓은 집이라야 심을 수 있었을테니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는 집은 제법 살만한 집이고 딸이 태어난 집일 것이다.제주에서도 집집마다 심어져있는 나무가 있다. 바로 감나무이다. 가끔 웃드르라고 불리는 중산간지대의 밭 구석에도 감나무가 있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민가가 있었던 곳이란 증거일만큼 제주 사람들은 집집마다 감나무를 꼭 심었다.이 감은 먹기 좋은
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 온 외지인이나 해방 후 취재를 온 기자들이 남긴 답사기나 여행기에는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장면이 꼭 들어있다. 물동이를 육지에서처럼 이고 다니는 게 아니라 지고 다닌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 일을 오로지 여자들만이 한다는 것도 놀랍다는 것이다.제주도는 모든 것을 대를 쪼갠 대오리로 만든 구덕이라고 하는 바구니에 넣고 배라고 하는 멜빵으로 지고 다닌다. 이것은 제주도의 독특한 지형 때문이다. 제주도는 길이 온통 자갈이 많아서 이고 다니다간 돌부리에 채여 넘어진다. 땔감도 짐도 물동이도 오로지 여자들만이 지고 다니
제주도 관광 상품가운데 전세계로 가장 많이 팔려나간 제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돌하르방이 아닐까 싶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하르방 기념품은 물론이고 돌하르방의 이미지를 이용한 상품까지 다양하게 만들어져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돌하르방이 정말로 제주를 대표할만한 것일까?이 질문에 대하여 젊은 사람들은 노인분들이 알지 않을까요? 했고, 노인들은 젊은 사람들이 알 것 같은데,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주도 사람들은 모른다는 얘기다.돌하르방이라는 명칭도 따지고 보면 붙여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 제주섬에 온 이들은 지상낙원을 보았다. 한라산은 넘치는 열매와 사냥거리를 주었고, 포악한 태풍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바다에선 사시사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늑대와 같은 포악한 맹수도 없었다. 곳곳에 천연 동굴이 넘치고 날씨가 따뜻해서 굳이 옷을 껴입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가 바로 에덴 동산이었다. 소천국이 사는 곳은 그런 곳이었다.“사람들은 몸집이 작고 머리를 깎고 가죽옷을 입는데 상의만 있고 하의는 없다” 《후한서》 (동의열전)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 이브였듯이, 소천국의 아내인 금백주(백주또)는 신의 뜻을 어
탐라국 건국 신화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땅속에서 솟아난 세 명의 신인인 삼을나가 바다에서 온 벽랑국 세 여인을 맞아 결혼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고 나라 살림이 나날이 불어나 살기 좋은 땅이 되었다. 삼을나는 활을 쏘아 3구역으로 나눠 평화롭게 다스렸다.탐라국의 건국과정이 이토록 평화로웠을까? 고대국가로 발전하려면 갈등과 전쟁이 없이는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땠을까? 그때 일어난 일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신화가 송당 본향당신화이다.송당 본향당 신화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제주 토박이 소천국은 바다 건너온 농경인
제주도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제주는 화산섬이니 당연히 화산이 폭발해서 만들어진 거 아닌가? 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제주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제주섬을 만든 것은 설문대할망이라고 생각했다. 제주 곳곳의 오름과 암석에는 설문대할망의 흔적이 남아있다.설문대 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워 두 다리는 관탈섬에 걸쳐 낮잠을 자기도 했고, 일출봉 분화구를 돌구덕 삼아 빨랫감을 담고는 우도를 돌빨래판 삼아 빨래를 했다고도 한다. 이토록 거대한 설문대할망의 키는 한라산의 25배, 무려 49㎞로 서귀포에서 제주시까지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이란 사람이 200년 전에 쓴 일명 에 이런 문장이 있다고 한다.“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냉국에 된장을 넣어 먹는다면 당신은 제주사람!이다제주 사람들이 왜 그토록 된장을 즐겨 먹게 된 것일까? 이것에 대해선 염전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세상에, 사방팔방이 바다인 섬에서 소금이 귀하다니! 하겠지만 제주의 바다는 소금결정이 만들어지기 힘들었는데, 한라산에 내린 엄청난 양의 비가 바다로 흘러들어 염분농도가 낮기 때문이다. 해남 등
1273년에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후 몽골군은 제주에 눌러 앉았다. 처음엔 일본정벌을 위한 군사기지로 쓸 생각이었지만 곧 직할령으로 삼았다. 고려의 제주목이었던 제주는 탐라국의 이름을 되찾았다. 일본정벌을 포기한 후에도 원은 탐라국을 고려정부에 줬다 뺏었다 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원의 멸망직전에는 탐라에 피난정부를 세울 생각으로 최고급 궁궐 기술자들을 보내기도 했다. 몽골인들은 제주를 '낙토' 즉 파라다이스라고 불렀다.1276년에 탑자적이 탐라총관부의 우두머리인 다루가치로 부임하면서 몽골말 160필을 가져왔다. 제주는 동서로
1105년 탐라국은 오랜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고려에 편입되었지만 성주와 왕자의 지위는 유지되었다. 마치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실이 '이왕가*'라는 일종의 귀족으로 특별대우를 받았던 것처럼 고려정부에서도 귀족대접을 받았다.귀족을 인정하지 않는 조선이 건국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성주는 왼쪽(제주 동부)을 다스리는 좌도지관, 왕자는 오른쪽(제주 서부)을 다스리는 우도지관이란 토관직**을 받는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 없어지고 제주는 세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며 이를 총괄하는 제주목사가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이로서 탐라국의 모든 기득권이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