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부랴부랴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일찍 법원에 도착했다. 재판이 열리는 302호 법정은 아직 안내 모니터조차 켜지지 않았고, 한 법원 직원은 덜 마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황급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법정 앞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잠시 후, 제주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이번 사건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서 대표가 여유롭게 4층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선고를 앞둔 피고인임에도 연신 웃으며 일일이 호화 변호인단과 서로 덕담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니 화가 치밀어 올라 잠시 호흡이 가빠졌다.제주지방법원 302호 법정 앞 의
1995년, 그 해엔 기억할 만한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군대 영장이 날아들었고 다니던 대학은 휴학했다. 활동하던 밴드는 잠정 해체를 했다. 새 일렉 기타를 갖게 됐고 멋드러진 태광 오디오가 생겼다.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자 하루종일 기타를 쳤다. 그러다 지루해 지면 오디오로 음악을 틀었다. 평범하고 수수한 날들이 계속 됐다.주방을 개조한 나의 방은 낮에는 죽은 듯 늘어졌다 밤이 오면 갑자기 활기를 띄었다. 옅은 조명과 빨간색 촛불, 진득한 블루스 음악이 흐르는 뮤직바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러면 기타를 놓고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이 책은 2002년에 나왔다. 우리나라에는 2004년에 옮겨서 나왔다. 지금부터 21년 앞서 나온 책이다. 지금에 와서야 더욱 뜻이 깊다. 우리나라는 젊은 사람들이 혼례를 치루지 않고, 혼례를 치룬 사람들도 아기를 하나 낳거나 아예 낳지 않는다. 또 아기는 대부분 병원에서 낫는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반 넘게 배를 갈라서 아기를 낳는다. 유럽에 있는 많은 나라들은 점점 배를 가르며 아기를 낳는 일이 줄어든다.글쓴이는 말한다. 아기를 낳을 때 기계를 쓰면 아기가 자라면서 거칠어진다고. 또 아기가 서둘러 나오도록 약을 먹으면 아이가 자라
제주의 5월은 아름답습니다. 온갖 꽃들이 아름답고, 새순과 묵은순이 어우러진 나무의 녹색 향연이 아름답습니다. 제주의 5월은 분주합니다. 아름다운 제주를 즐기러 방문하는 사람과, 맞이하는 사람으로 분주합니다. 관광객들이 싱그러운 표정으로 제주의 5월을 향해 첫발을 떼는 곳, 제주공항입니다.하지만 관광객들에겐 낯선 제주민중의 역사가 제주공항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재수의 난으로 대표되는 제주민중 저항의 역사가 새겨진 ‘진터왓’, 일만팔천 신을 영접하던 ‘오리정’, 일제의 정드르비행장 건설 이후 세 번의 철거로 지도에서 사라진 마
([부부해방전선] 흔들리는 당근 속에서 장범준을 보게 된 거야에서 이어집니다.)“사북이다!”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던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급격하게 불행해졌다. 믿거나 말거나 장범준이 썼다던 드럼이 주인공인 그 드라마에는 어떤 반전도 없었다. 제주의 옛날 사람이 포착한 드럼을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할 리 없었다. 사북 인근에서 남편보다 한 발 빠른 구매자가 나타난 것. 그럼 그렇지.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 드럼을 허락할 의사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제풀에 지치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는 자꾸
올해 개관 10주년 맞는 왈종 미술관 조선백자를 닮은 왈종 미술관은 자연의 빛과 바람이 그대로 전달된다.30여 년간 화가에게 행복을 주었던 서귀포에 작은 선물이 될 수 있는 공간으로 자신이 살던 집을 헐고 그곳에 300평 규모의 3층 건물로대형 백자 찻잔처럼 생긴 모습으로 왈종 미술관을 지난 2013년 5월에 문을 열었다.1층에는 수장고와 도예실,2층에는 작가의 회화, 도예 및 판화작품 등을 모아놓은 전시실, 3층은 작가의 작업 공간으로 꾸며져 있고, 계단을 따라 옥상 전시실(2016년 완공)에 오르면등지고 있는 한라산과 제주의 남
족낭은 종낭이라고도 하는 때죽나무를 가리키는 제주말이다. 때죽나무과의 낙엽 교목이며 줄기는 갈색이다. 우리나라에는 중부지방 남쪽으로 산야나 계곡 주변에서 자생한다. 수피는 매끄러우며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다.5월 중순부터 6월 상순까지 해발 고도가 낮은 산야에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여 차츰 높은산까지 작은 종모양의 꽃들을 잎 겨드랑이마다 흐드러지게 피운다. 귀여운 꽃방울들이 나무밑을 향하여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을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아리따운 소녀들이 은방울 귀고리를 달고 있는 듯하여 매우 귀엽다.때죽나무라는 이름은 작은 열매 속에
‘도시는 누가 만드는가’하는 질문은 ‘어떤 관점에서 도시를 만드는가’하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소수의 정책 입안자 및 집행자의 능력과 관점도 중요하지만, 성별, 연령, 지역, 계층 등 다양한 사람들의 정책 참여와 요구 반영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정책행위자들이 시민들의 다양한 위치와 요구를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으로, 이는 무엇보다 정책에서 편견과 선입견을 제거할 수 있게 한다. 한 예로 도시 제설작업을 들어보자.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제설작업의 우선순위는 어디인가? 보통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주요도로에
지난달 4월 26일, 대전정부종합청사 문화재청 앞. 월정리 해녀들은 서러움의 울분을 토했다.세계유네스코 등재 제주 용천동굴이 제주동부하수처리장 증설사업 전 제대로 조사조차 되지 않고 밀어붙이기식 공사강행으로 위협에 빠져 있다. 그 현장을 밤낮으로 지키는 해녀들. 기자회견 사회를 보고 있던 나와 현장에서 연대하고 있던 사람들도 함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문화재청 관계자들은 그들이 어떤 불찰을 저질렀는지 민원을 제기하겠다는 해녀들을 문전박대했다. 결국 긴 실랑이 끝에 겨우 공식적인 민원을 넣을 수 있었다. 세계자연유산을 지키고 있
남편이 새벽부터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떠보니 5시쯤 되었나. “사고 싶은 드럼이 당근에 나왔어!” 이 남자가 밤을 샌 건가? 그러고도 남을 자이긴 하다. 직장인 오케스트라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J부부를 만났는데, 그들 덕분에 엉뚱하게 그의 ‘음악인 로망 버튼’이 눌려버렸다. 게다가 그 부부 동반 모임에는, 데뷔 30년 차인 우리나라 최고 밴드의 베이시스트까지 있었다. 다 음악을 하는데, 우리 부부만 아니었던 것이다.그의 단순한 사고 회로가 작동했다. 그는 우리 부부만(혹은 나는 빼더라도 자기만이라도) 뭐든 연주하면 일 년에 한
느려서 행복한 섬 '청산도' 모든 풍경이 작품이 되는 느림은 채움, 곧 쉼이다.푸른 섬 청산도의 관문 '청산도항' 맑고 푸른 다도해와 조화를 이루는 절경이 엽서 속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섬길은 청산도의 관문인 청산도항에서 시작된다.여기저기 ‘슬로길’을 알리는 안내판, 슬로길은 말 그대로 천천히 걷는 길로 시간에 쫓겨 바삐 걷다 보면 슬로길의 참 의미를 놓쳐버린다.빨간색과 하얀색 등대를 지나 청산도항에 발을 디디면 처음으로 만나는 청산도에서 가장 붐비는 도청리 그 중심지인 도청 2리 파시거리는 활발했던 최대의 상업거리이자 청산도
1270년 6월.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다. 멀고 먼 강화도에서 벌어진 일은 탐라국을 뒤흔들었다.무신정권이 마침내 무너지고 개경으로 고려정부가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말하자면 초개와 같이 버려졌다. 초개란 제사에서 신의 모형으로 만들어 받들어지지만 제의가 끝나면 버려져서 아무나 짓밟는 존재란 뜻이다. 고려 유일의 엘리트 군사집단으로서의 자부심이 땅바닥에 떨어졌으니 고려정부가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해체할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대몽항쟁의 유일한 정예군으로서 탄력을 받아 나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결과는 역사가 알려주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