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동박새와 사랑을 나눈 뒤에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떨어졌습니다. 흰 보자기에 황금술잔을 올려놓은 수선화도 추사의 붓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일찍 나온 복수초가 찬바람에 놀라 노란 몸을 후드득 떱니다. 산수유는 팝콘이 튀겨 나오듯 노랑 망울들을 하늘에 쏟아냅니다. 이제 목련은 겨우내 입었던 솜털 옷을 벗어 하얀 속살을 드러낼 것이고, 진달래는 헐벗은 가지에 분홍 연정을 매달아 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꽃들의 전쟁이 시작되어 온 세상이 천연색으로 물들어 갑니다. 봄은 꽃이고, 꽃은 봄입니다. 상춘객들은 산과 들로 몰려 나가 꽃 사
5년 만에 치과에 갔다. 입안을 드러내어 진단을 받았다. 금이 간 치아가 있어 이를 뽑아내고 인조 치아를 심었다. 진단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대선후보들이 잇달아 농업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공약들이 본질적이고 효과적인 처방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농업·농촌의 위기와 환경변화를 바르게 진단하는 것이 우선이다. 농업이 당면한 가장 큰 위기는 기후변화다. 폭우·폭염·가뭄·한파 등 세계적인 기상이변이 일상이 되었다. 이는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을 어렵게 해 곡물자급률 21.0%인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다. 온난화로 한라봉이 전
입춘하면 떠오르는 것이 보리의 뿌리 개수로 풍흉을 점치던 기억이다. 샛절 드는 시간에 보리를 한 움큼 뽑아 온 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인 필자에게 뿌리의 개수를 세라고 했다. 누런 보리 씨에서 돋아난 흰 줄기가 점점 푸르러지면서 연녹색으로 끝을 맺는 잎과 실처럼 길게 뻗는 매끈한 하얀 뿌리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꼈었다.아버지가 뿌리가 하나면 흉년이 들고, 둘이나 셋이면 풍년이 들며, 넷이 넘으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넷 이상이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보리가 어릴 때 웃자라면 쓰러진다
지난 19일 LG에너지솔루선 공모주 청약에 440만명이 114조원을 투자했다는 기사와 양배추 재배면적 1904ha 중 250ha를 폐기처분한다는 기사가 동시에 나왔다. 돈을 향한 끝없는 욕망이 노동의 가치를 폐기하는 것 같은 기시감에 씁쓸함이 몰려왔다. 작년도 국세수입은 342조원으로 60조원이 더 걷힌 것으로 잠정 집계되었다. 집값 급등으로 인한 양도소득세와 주식시장 활황에 따른 증권거래세 및 상속·증여세가 예상보다 많이 걷혔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서민들이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에도 가진 자들은 자본소득으로 부를 더 축적
새해 첫날이다. 바람이 그치고, 둥근 해가 오름 위로 올라와 검은 장막에 갇혔던 한라산을 드러낸다. 하얀 눈으로 덮인 한라산이 ‘어흥’하고 다가온다. 인내, 독립, 도전을 상징하는 ‘검은 호랑이’해가 시작된 것이다. 호랑이 같은 강인함과 패기로 희망을 일구는 청년농업인 얼굴들이 떠오른다. “새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뒷마당은 버림받은 듯 씁쓸했다. 죽은 듯 조용한 봄이 온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비탄에 잠겼다. 그러나 이 땅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막은 것은 사악한 마술도 악독한 적의 공격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저지른
지하수오염으로 정수장 오염물질 차단 및 정화 시설에 제주도민 혈세 3800억원이 투입된다고 한다. 제주도 내에는 17개 정수장이 운영 중인데, 그 중 9개 정수장은 취수 심도가 100∼300m로 여과시설 없이 소독만 하여 수돗물을 공급하고 있다.최근 심정지하수에서도 분원성대장균이 검출됨에 따라 제주특별자치도는 2028년까지 이들 9개 정수장에 380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여과공정을 도입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제는 축산분뇨 등이 유발한 오염이 심정지하수까지도 여과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러 제주도 농림어업 GRDP 1조8천억원의 2
키가 크다고, 몸무게가 덜 나간다고, 장애가 있다고 채용을 제한하면 명백한 신체적 차별행위이다. 하지만 감귤 세계에서는 ‘제주도 감귤생산 및 유통에 관한 조례’에 따라 크기가 2S(지름이 49mm~54mm미만)~2L(지름이 67mm~71mm)을 벗어난 감귤은 ‘응시원서’조차 낼 수 없는 비상품감귤로 치부된다. 같은 무리끼리 모이지 않아도 차별을 받는다. 농산물 표준규격에 ‘낱개의 고르기’라는 기준에 따라 무게가 다른 것이 섞이게 되면 등급이 낮아진다. 그래서 농업인들은 실질과 상관없는 크기선별 작업을 한다. 감귤을 출하하려면 물 등
겨울 초입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잉걸불에서 물고구마를 꺼내 입으로 손을 후후 불어가며 감저 껍질을 벗겨주던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제주에서 고구마는 감저(甘藷)라고 한다. 1938년 총독부에서 펴낸 제주도세요람에서 “감저는 제주도의 풍토에 가장 적합한 작물이자 농가대용식량이다.”라는 기록처럼 제주도에서 고구마는 보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다. 고구마가 제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764년(영조 40년)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쓰시마섬에서 구해온 씨 고구마를 동래지방 및 제주도에 심도록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푸른빛을 띤다고 해서 ‘푸린콩’, 계란과 같은 타원형이라고 해서 ‘독새기콩’, 장을 담글 때 쓴다고 해서 ‘장콩’이라고 불리는 제주에서만 재배되는 푸른콩을 아시나요?제주에서 콩은 보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다. 제주토양은 화산회토가 대부분이라서 화곡류 재배가 힘들었다. 조상들은 똥돼지를 키우고, 해초를 캐어 거름을 만들어 토양에 부족한 양분을 보충하는데 살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콩과작물은 뿌리혹박테리아와 공생하여 공중질소를 고정해, 10평당 약 1kg의 질소비료를 만들어낸다. 콩과작물은 질소비료를 주지 않아도 비교적 잘 자
은사님이 일흔아홉 번째 생신을 맞아 제주에 내려오셨다. 서른두 살에 은사님을 만나 학문과 술을 통해 삶을 배웠다. 은사님은 돈 없는 학생의 처지를 헤아려 자비를 들여가며 제주에 내려와 주례를 서주셨다. 결혼 10주년에는 자폐아 딸을 키우느라 여행을 못가는 우리 부부를 위해 일주일 동안 아이들을 돌보아주시기도 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 년에 한 번씩 우리 가족은 육지에 올라가 교수님 댁에서 자고, 교수님 내외분은 제주에 내려와 우리 집에서 주무신다.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며 소식을 주고받는다.돈을 번다고 큰 딸이 케이크
친환경농산물의 정의를 말해 보라고 하면 소비자들은 농약을 쓰지 않고 재배한 농산물이라고 대답한다. 농업인들은 합성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으면 ‘유기농’이고, 합성농약은 사용하지 않고 화학비료를 권장량의 ⅓이하로 사용하면 ‘무농약’이라고 구분하여 답한다.과연 합성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재배하면 친환경농산물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친환경농어업 육성 및 유기식품 등의 관리・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친환경농업은 생물의 다양성을 증진하고, 토양에서의 생물적 순환과 활동을 촉진하며, 농업생태계를 건강하게 보전하
가지는 치커리와 함께 제1권력자(?)에게 잘 키웠다고 칭찬을 듣는 ‘유이’한 채소이다. 가지는 병충해에 강해 대에 묶어주고 곁순만 따주면 손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7월 중순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계속 열린다. 가지는 필자처럼 게으른 농부에게는 최고의 작물이다. 가지 꽃은 토마토와 감자 등 가지과가 그러듯 별 모양을 하고 있다. 꽃 가운데 5개의 수술이 있고, 그 수술들 안에서 한 개의 암술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연분홍 꽃잎, 진노랑 수술, 흑자색 암술머리가 청순했던 연애 시절의 제1권력자를 떠올린다. 열매는 통
전혀 관련이 없던 사건들이 하나의 추억처럼 붙어 다닐 때가 있다. 양애지(양하 장아찌)를 먹을 때마다 프린스의 ‘퍼플 레인’이란 노래가 들려온다. 그녀의 짧은 머리칼에서 흘러내린 보랏빛 비가 그녀의 얼굴을 적신다. 생강과 샐러리를 섞어놓은 것 같은 독특한 향기가 입 안에 퍼진다. 두발자유화 조치가 떨어지자마자 우리 중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커트를 한 그녀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내 머리 어때?”라 묻던 눈동자가가 떠오른다. 그 때는 단순명쾌했던 그녀의 당돌함이 싫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앞뒤를 재지 않았던 그녀의 당돌함이 부럽다.어릴
계속된 비 날씨로 미루었던 감자를 심었다. 아니 재를 묻힌 감자를 흙속에 묻었다. 봄감자는 씨감자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심지만 가을감자는 통째로 묻는다. 늦여름에 감자를 절단해서 심으면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씨감자는 줄기를 뻗으며 작은 알들을 매달고, 가을햇빛을 모아 그 알들을 키워낼 것이다. 서리가 내리면 줄기를 잡아 당겨 주렁주렁 달린 감자를 거두어들였다가, 눈이 내리는 날 포슬포슬 삶아내어 가족들과 후후 불어가며 먹을 것이다. 상상은 고흐의 로 이어진다. 가족으로 보이는 다섯 사람이 허름한 식탁에 둘러앉아
봉준호 감독의 영화 는 한정된 자원을 가진 지구에서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적정인구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의 주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단히 불편한 영화다.영화는 세계 79개국 정상들이 지구온난화에 대응하여 ‘CW-7’ 살포를 발표하는 뉴스로 시작된다. 시간은 바뀌어 2031년이다. 살아남은 인류를 태운 열차가 무한궤도를 따라 17년째 질주하고 있다. 열차 밖 세상은 냉각제 CW-7의 부작용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무임승차자들이 탑승한 꼬리 칸,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가 갇혀
‘보리윷’은 법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노는 윷을 뜻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는 여럿이 있을 때 있는 둥 없는 둥 쓸모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보리범벅’은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을 말하며, ‘보리떡에 쌍장구’는 하는 짓이 격에 어울리지 않음을 비유하는 속담이다. 이처럼 보리에는 모자라다는 의미와 업신여기는 뉘앙스가 들어 있다.보리는 1980년대까지 쌀과 함께 우리 민족의 주식이었고, 엿기름, 된장, 누룩, 보리차 등의 원료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보릿고개를 넘어가게 했던 구휼곡(救恤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가 천대를 받았던 이
풋사랑은 상큼하고 달달하지만 풋과일은 시고 떫다. ‘풋’이라는 접두사가 뜻하는 것처럼 풋과일은 덜 익은 과일이다. 그래서 ‘풋’자가 들어간 과일의 이름만 떠올려도 입안이 시큼해지고 얼굴이 찡그려진다. 고등학교 시절, 누나는 장 보러 갈 때 필자를 짐꾼으로 대동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오리’ 사과를 사주었다. 필자는 푸른 껍질에 이빨 자국을 남기며 아삭한 중과피를 씹었다. 그러면 촌아이로 되돌아간 것 같아 도시 생활에 졸아들었던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오리의 정식 명칭은 ‘쓰가루’이다. 일본 아오모리현 사과연구소에서 개발한 품종이어
24절기의 12번째인 대서(大暑)가 코앞이다. 불볕더위와 찜통 습기가 기승을 부린다. “대서에는 염소 뿔도 녹는다”는 속담을 몸으로 실감하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농민들에게는 봄걷이가 끝나고 모내기와 콩, 참깨 등의 파종을 마쳐 모처럼의 여유를 누리는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농가월령가 6월령은 ‘젊은이 하는 일이 김매기 뿐이로다.’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보리단술 먼저 먹고, 맑은 바람에 배부르니 낮잠이 맛있는 좋은 세월이로구나.’라고 노래하고 있다. 양반들은 더위를 피해 산정(山亭)이나 계곡에서 시를 읊으며, 어린 암탉을
비가 오면 지렁이는 왜 도로 위로 기어 나올까?비가 쏟아진다. 서식처를 잃은 지렁이들이 도로 위로 기어 나온다. 차들이 지나간다. 지렁이의 슬픈 운명이 도시화에 대한 단상을 불러일으킨다.우리나라의 도시화는 산업화로부터 기인되었는데 산업화는 제3공화국이 제2공화국이 수립한 을 실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3공화국은 부족한 자본을 ’덕수(광부)’와 ’영자(간호사)’가 독일서 보낸 돈, 대일청구권 포기와 맞바꾼 원조와 차관, ’변진수(파월 군인)’와 ’채규장(파월기술자)’의 송금액 등으로 충당하였고, 저곡가
조선이 5백년을 유지한 토대가 19페이지에 밖에 되지 않는 『농사직설(農事直設)』 때문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믿을까?세종은 1428년(세종 10년) 6여 년간 계속된 가뭄과 흉작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목도하고, 10일간 수저를 들지 못한다. 왕은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농업혁신에 국가역량을 집중하기로 결단하고,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의 감사들에게 농사 잘 짓는 노농(老農)들의 경험과 지혜를 조사하여 보고토록 한다. 그리고 정초와 변효문을 시켜 그 보고 결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농사직설』을 완성한다.『농사직설』의 본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