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님, 안 바쁘요?”“아..네... 괜찮습니다”“그라마 내 하나 물어보입시다. 이거는 어떻게 하면 좋겠으요?”A 할매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전화를 하신다. 전화를 받기 전엔 침을 꼴깍 삼키며 각오를 좀 해야 한다. 할매와의 통화는 짧으면 30분, 길면 1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걸걸하고 화통한 부산 할매인데가 일면 꼼꼼하기까지 하셔서, 내가 알 수 없는 노인회관의 내밀한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신다. 어느댁 어르신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알려주시기도 하고, 도로 옆 제초작업을 해놓고 풀을 널브러뜨리고 안치우고 갔다고
K에 대한 이야기는 20여 년 전 처음 들었다. 당시 음악 동료들에게서 들은 그의 일화들을 종합해보면 자연스레 떠오른 문장이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당시 국내의 내로라 하는 기타리스트들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유명 기타리스트조차도 그에게는 한낱 아마추어일 뿐이었다. 나는 그런 K의 안하무인적인 태도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고 상상이 더해지자 경외감까지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그가 직접 재즈클럽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어스름이 막 내리기 시작한 저녁 무렵 친구들과 클럽을 방문했다. 용두암 해안가에서 공항쪽으로 걷다보니
나는 존재하지만 가끔 나의 존재는 일상에서 지워진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 ‘국민’재난지원금 등의 사회서비스의 경우,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제공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국민에게만 적용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된 외국인 많고 ‘국민’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외국인’도 적지 않다. ) 하지만 이러한 제도의 이름에도 잘 드러나듯 ‘국민중심’, ‘국민이 먼저다’라는 ‘국민우월주의’식의 인종주의적 가치가 사회서비스의 밑바닥에 깔려있다. 그래서 비국민이 하는 기여 혹은 그들이 내는 세금은 국민우월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이란 사람이 200년 전에 쓴 일명 에 이런 문장이 있다고 한다.“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냉국에 된장을 넣어 먹는다면 당신은 제주사람!이다제주 사람들이 왜 그토록 된장을 즐겨 먹게 된 것일까? 이것에 대해선 염전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세상에, 사방팔방이 바다인 섬에서 소금이 귀하다니! 하겠지만 제주의 바다는 소금결정이 만들어지기 힘들었는데, 한라산에 내린 엄청난 양의 비가 바다로 흘러들어 염분농도가 낮기 때문이다. 해남 등
가지는 치커리와 함께 제1권력자(?)에게 잘 키웠다고 칭찬을 듣는 ‘유이’한 채소이다. 가지는 병충해에 강해 대에 묶어주고 곁순만 따주면 손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7월 중순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계속 열린다. 가지는 필자처럼 게으른 농부에게는 최고의 작물이다. 가지 꽃은 토마토와 감자 등 가지과가 그러듯 별 모양을 하고 있다. 꽃 가운데 5개의 수술이 있고, 그 수술들 안에서 한 개의 암술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연분홍 꽃잎, 진노랑 수술, 흑자색 암술머리가 청순했던 연애 시절의 제1권력자를 떠올린다. 열매는 통
㈔제주다크투어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진행하는 제주4·3역사교류사업의 일환으로 경비 일부를 지원받아 대전 골령골 유해 발굴 현장 지원활동을 다녀왔습니다. 이 글은 유골 발굴 지원을 다녀온 이후 작성된 후기입니다. 골령골 유해 발굴 현장에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알리기 위해 힘쓴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이런 뜻 깊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에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Bone talks(뼈는 말한다).”한국전쟁 당시 수천 명이 학살된 대전 골령골 유해 발굴 현장을 지휘하던 노 교수
공깃돌 바위에 스며든 여신의 지문하늘과 땅이 하나로 붙어 있었던 혼돈의 태초, 홀연히 나타난 엄청난 거인이 하늘을 떠받치고 땅을 떠밀며 갈라놓으니 틈이 크게 벌어지며 세상이 자리 잡을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 거인을 일러 누군가는 도수문장이라고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설문대라고 부르며 저마다 창조주를 찬양한다. 섬사람들이 말하는 창조주가 누구였든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단숨에 만물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갈라놓는 빅뱅을 시작으로 해와 달과 뭇별을 만드는 단계로 이어졌다. 이렇게 우주가 만들어진 뒤에 비로소 대지와 만물을 빚어냈
2016년과 2018년 내가 사는 메릴랜드주 엘리콧시티(Ellicott city)에는 갑자기 하늘의 구멍이 뚫린 듯 미친 듯이 비를 쏟아냈고 삽시간에 불어난 물은 잔뜩 성이 난 채 도로, 상가, 주택들을 가리지도 않고 완전히 뒤덮여 큰 피해를 주는 일이 있었다. 이 홍수사태는 천년에 한 번 일어날 홍수가 2년사이 두 번 발생했다고 방송에서 크게 보도가 되었다.그 이후로도 잦은 폭풍우로 인한 정전 사태가 한동안 자주 일어났었고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전 미주지역에서 가뭄과 국지성 폭우, 강력한 허리케인 등 기후 변화로 인해 밀, 옥수수
초가을 저물녘달맞이 나선 들판에망아지 하나 백골이 되어 마중한다.여름 끝자락먼길 떠난 망아지어느새 살옷 훌훌 벗고저문 하늘 바라본다.오름 굼부리 위로둥근달 떠오르고어미말 하나묵묵히 풀뜯는다들판 저 멀리 어둠속노루 울음소리 밤공기 가르는데담 낮은 무덤 하나달빛 아래 적요하다.달빛 들판 나서다 마주친길섶 그림자 하나무심한 자동차 불빛에채 감지 못한 눈동자 반짝이며밤하늘 바라본다.아! 애이불비*가을밤이여.애이불비 : 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함 김수오제주 노형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수오 씨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이리 나와 봐!”며칠 전 아침, 나를 불러대는 남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마당으로 나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빈티지 토분인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투박하고 거친 것이 빈티지라고 우겨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웠어?"라고 묻긴했지만 뻔히 짐작됐다.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 동네 클린하우스!"남편은 버려진 것들 사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내는 일에 좀 재능이 있는 편이다. 나는 버려진 물건들을 다시 사용하는 일에 심정적 거부감이 없는 편이다. 버려지는 것들 가운데는 아직 쓸 만
# 제주 청년들의 회한과 원망(願望)제주에 터붙이고 살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중의 하나로 예전에 제주에서 뭍으로 유학간 대학생들의 동질감이나 동류의식 같은 걸 새삼 느끼곤 한다. 이는 물론 제주섬출신이라는 베이스가 깔려있겠는데 이를 넘어 오래도록 그이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 같은 것, 제주사람 본래의 떨쳐낼 수 없는, 단지 역사가 아니라 실제 자신들의 삶속에 분명히 각인된, 살아 꿈틀거리는 그럼에도 겉으로 쉽사리 드러내지 못하는 징표 같은 것, 바로 ‘4·3’이 같이 자리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제주의 청년들이 품고 지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뭘까. 딱 하나만 꼽으라면 땅을 일궈서 먹을거리를 거둬들이는 일이다. 그런 농사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농사물이 싼 값에 팔리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떠나기 때문이다. 지난날에는 농사를 지으면 가까운 장터에 내다 팔거나 이웃끼리 나눠 먹었다. 지금은 바다를 건너서 먹을거리가 오기도 한다. 또 비싼 값을 받고 농산물을 팔기 위해 쌀보리 농사보다는 고추, 당근, 무, 인삼, 귤 같은 환금작물을 심는다. 같은 작물을 해마다 지으니 땅이 기름지지 않는다. 농사꾼이 적으니 온갖 기계로 농사로 짓는다. 기계로
매년 반복되어 돌아오는 시기나 계절에 꾸준히 찾아 듣는 음악의 힘은 강력하다. 그 시기의 정취를 느끼면서 지나온 시간의 감정을 기억하고, 매년 다르게 찾아오는 시간의 감성을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기 때문이다.명절이 지나고 바람의 온도를 느끼니 완연한 가을이 온 것 같다. 모기는 더러 있지만, 더위는 끝나가고 시원한 바람과 푸른 하늘을 누리기 좋은 날씨가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가을이라는 계절을 가장 좋아하는데, 특유의 여유와 적절한 기온과 날씨 그리고 이들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가을 노래가 많기 때문이다.누구나 가을 하면 생각나는
모든 생명에게는 죽음이 있다. 그리고 죽음은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른다. 지금 당장일 수도 있다. 죽음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산다. 그저 자신이 살고 있음에도 감사함을 모른다. 걷는 것, 먹는 것, 말하는 것, 보는 것 모두 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이 감사함을 2년 전 2019년 10월 1일에 일어난 교통사고 이후 깨달았다.사고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건강한 몸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살아있는 것이 기쁜 일이고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상쾌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새로운 지혜를 알았다
산더미 같은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버튼을 누른다. '쏴아' 하는 물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에 행복해진다. 생뚱맞게 웬 빨래타령인가 싶어 의아한 분들이 계실까 모르겠다. 그런데 동물보호 단체 일이라는 게 그렇다. 동물과 마주하는 일 외에도 참 많은 일들을 해야한다. 길고양이 중성화를 위한 포획작업이나 구조작업(보통 한마리 구조에도 열 개 이상의 포획틀을 준비해야 한다.)에 나갔다 온 후 포획틀 세척과 덮개 빨래도 그 중 하나다.봉사활동을 다녀온 후 목장갑이나 조끼를 빠는 일도 그렇다. 깨끗한 상태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동물들
자연을 만나는 환상 숲길 한라산 둘레길은 해발 600~800m의 국유림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일제강점기 병참로(일명 하치마키 도로)와 임도, 표고버섯 재배지 운송로 등을활용한 80km의 둘레길을 말한다.천아수원지~돌오름~무오법정사~시오름~수악교~이승악~사려니오름~물찻오름~비자림로 등을 연결하는 환상 숲길이다.사려니숲길은 제주시 봉개동 절물오름 남쪽 비자림로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약 16km의 숲길을 말한다.한라산 국립공원 동측 경계인 성판악휴게소 동남쪽에 형성된요존국유림지대에 위치하고 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잠을 잘 이룰 수 있어 더없이 좋다. 당근솎기에 바쁜 요즘 밭에서 일하기에는 여전히 땀을 많이 흘리게 되지만 잠자리에선 두툼한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며 행복한 미소를 나도 모르게 짓게 된다. 이런 날씨가 시작되면 보리차가 맛있어진다. 달콤한 봉지커피도 더 맛있어지고 작두콩차를 찾는 소비자도 하나 둘 늘어간다. 올해는 작두콩을 하나도 수확하지 못했으니 이런 날을 즐길 다른 차를 더 준비해 두어야겠다. 작두콩만이 아니라 땅콩도 한 알을 건지지 못했으니 수확 철을 맞아 조금 억울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
제주는 돌 위에 흙이 쌓인 섬인데, 흙이 얇기도 해, 바람불면 곡식이 쉽게 넘어지고, 비가 오면 휩쓸리기 일쑤, 해가 너무 오래나면 돌밭에서 곡식이 말라붙기 십상이다. 섬에 밭쌀을 키울 수 있는 땅도 귀하지만, 우리집은 그 마저도 없으니 장만해둔 쌀은커녕 보리도 메밀도 바닥이 났다. 한움큼 남은 좁쌀이 떨어지기 전에 환상 곡식을 얻으러 창(倉:관덕정 서편 옛 시청자리)에 간다. 창뒷골(현재 주차장 주변에 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에 다다르니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줄을 섰다. 목사와 현감은 한양에서 내려와 녹봉을 받지만 그 아래 향리들
주민들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무근성 마을 지도를 보면 용천수인 질아랫물의 위치가 각각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무근성 마을회에서 제작한 마을 소개 자료에는 질아랫물과 기러기물이 같은 용천수로 설명되고 있고,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질아랫물과 기러기물이 각기 다른 용천수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각각 달라서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인터뷰와 사료들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고증할 필요가 있다. 개발로 훼손된 마을 용천수에 대한 자료정리와 함께….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에서
그때, 아버지가 손수 만든 아주 튼튼했던 그 책장에, 전혜린이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그리 두껍지 않았고, 양장 하드커버에 케이스까지 씌워진 책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누나의 책이었겠지. 어린 내가 읽기에는 어려웠고, 재미도 없었다. 그렇게 나에게 전혜린은 없었다. 이른바 ‘문학청년’의 시절에도 전혜린은 풍문처럼 지나쳤을 뿐, 나에게 전혜린은 없었다. 다만 곁다리 에피소드가 덧붙여졌을 뿐이다. 전혜린의 동생 채린의 남편은 영화감독 하길종인데, 하길종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같은 영화학교 동기였고, 그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