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아리따운 처녀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재앙을 일으키는 뱀이 이 굴에 살고 있사오니 부디 사또께옵서 그 흉측한 요괴를 퇴치하여 주옵소서.” 많은 사람들이 대히트를 쳤던 공포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등장했던 구좌읍 김녕리의 사굴(蛇窟)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최근에는 신진오의 소설 ‘무녀굴’과 그를 토대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져서 사굴의 뱀 이야기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예로부터 제주사람들이 뱀을 신처럼 떠받들어왔다는 사연을 외부로 알린 데에는 이 이야기가 가장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외부로 알려진 것이 김녕 사굴 이야기라면 제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해묵은 속담이 있다.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여성이란 그만큼 독한 존재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그러나 이 속담의 배후에는 여성을 억압하는 오래된 관습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억울한 사정에 처했어도 그것을 풀지 못한다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한들 한이 맺히지 않겠는가. 제주여성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제주여성의 억척스럽고 부지런함을 빗댄 속담인 “오름의 돌광 지새어멍은 둥글당도 사를 매 난다.” 또한 생업의 조건과 남성본위의 사회가 만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할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90년대 후반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자우림의 노래 ‘일탈’은 아직까지도 노래방의 애창곡으로 남아 환희와 열광을 유도한다. 노래가사처럼 미친 짓이라도 하고 싶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저 목청껏 내지르는 노래로라도 일탈을 감행하고 싶은 것이 애 어른 할 것 없는 요즘 사람들의 내심이다. 미친 짓이 두려우면 어디론가 훌쩍 여행이라도 감행하는 무모한 선택을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넌 왜 아직도 혼자냐?” “난 태어날 때부터 혼자 살란 팔자인가 봐. 세상 모든 신발)이 다 제짝이 있는 건 아니라고. 덜커덩 덜커덩 베틀신은 외짝이란 말도 몰라?” 만혼과 독신이 유행을 넘어서서 대세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원인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지 결혼을 해야 버젓한 어른 대접을 받는 한국사회에서 제법 나이가 들도록 독신으로 산다는 건 대단한 스트레스를 장신구처럼 달고 사는 일이다. 그 때문에 차라리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역설했던 원시난혼제의 세
“어디라고? 잘 모르겠는데. 알아수다. 어떻게든 찾아가쿠다.” 섬을 떠나 산 적 없는 제주토박이에다 제주시에서 40년도 넘게 살았는데 약속장소가 어딘지 도무지 모르겠다. 지도검색을 몇 차례 하고 네비게이터를 작동해야 간신히 찾을 수 있다. 내가 태어나고 여태껏 살아온 고향의 지리를 모른다니. 말 그대로 촌놈인 나에겐 숨 막히고 소름끼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어쩌다 시내버스에 몸을 맡기고 창밖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내가 사는 제주시가 맞는지 의심이 들곤 한다. 너무 많이 변했다. 수도권의 어느 신도시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 십
상실한 낙원, 에덴동산의 남녀 아담과 이브는 창조주와의 약속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만다. 황홀한 맛에 빠져든 두 남녀가 처음으로 한 일은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린 것이었다고 전해온다. 사람의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 세 가지를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의식주라고 한다. 여기서도 ‘의(衣)’가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소리이다. 이렇게 옷은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은 동물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만드는 첫 번째 장치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태초의 여신들은 한결같이 직조(織造)의 권능을 지니고 있다.직조, 외짝의 베틀신을 신고 씨줄
푸른빛이 짙고 짙어 볼수록 눈이 시린 아름다운 바다 협재와 금릉해변, 생떽쥐베르의 어린왕자 속 코끼리를 집어삼킨 보아구렁이를 닮은 비양도의 항해를 상상한다. 바다를 항해하다 누군가에게 그 모습을 들키자 그 자리에 오도카니 멈춰 섰다는 섬, 설악산의 울산바위, 경기도의 광주바윗섬, 진안의 마이산, 경북 등과 더불어 섬이나 바위가 움직이는 것을 지체이동(地體移動)의 이야기라고 한다. 경북 경주에는 세상이 시작되던 당시에 빨래하는 여인에게 들키자 그 자리에 멈춰버린 산 이야기가 있는데, 이때 빨래하는 여인은 누구일까? 태초의 여인이라면
동서고금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세상 사람들은 탄생과 죽음에 대한 경외심과 공포심을 동시에 지녀왔다.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쁨 못지않게 크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냈다. 이승과 이별한 영혼이 머물 저승이 없다면 삶 또한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좌절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제주의 옛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저승을 상상하고 탄생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성을 빚어왔다. 죽음의 신이 저승의 시왕이라면 탄생의 신은 ‘삼싱할망’이다. 그 때문에 제주의 굿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는 것이 시왕을 달래는 ‘시
신들의 고향 제주에는 여신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섬 자체가 거대한 여신들의 신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의 세상도 다른 지역과 달리 여성의 사회활동이 두드러지고 진취적인 것을 두고 여신들의 기운이 세서 그렇다고도 말한다. 농담 섞인 이야기를 굳이 진지하게 따져 묻기 머쓱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에게 인간처럼 성별이 있겠냐는 말이다. 물론 외형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아서는 그들도 남성과 여성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그것은 남성성과 여성성 중 어느 것이 우세한가를 겉모습에 덧씌운 결과
“요왕연맞이로~ 제청신도업이웨다~.” 진녹색저고리에 연반물치마를 곱게 차려 입은 심방이 치렁치렁한 백지 술이 달린 신칼을 휘휘 내젖는다. 바람이 숨죽였다지만 그래도 바닷바람이라 야트막한 돌을 얼키설키 쌓아 에두른 각시당의 담장은 더없는 바람막이다. 어디 바람막이일 뿐인가. ‘벨방 바당 일만ᄌᆞᆷ수 일만어부’들을 살뜰히 보살펴 주시는 신전님의 성역이기도 하다.이렇게 영등달 열사흘의 구좌읍 하도마을 각시당은 빼곡하게 들어찬 ᄌᆞᆷ수들로 부산하다. 이른 아침 멀리 떨어진 본
격랑과 폭풍이 잦아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 그대로 물명주 빛 물결 위로 실바람이 춤을 춘다. 구름 너울에 바람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여신이 심술을 거둔 것 같다. “때가 되었다. 삼대선 황포돛대 높이 올려라! 도사공아! 출항이다. 무른 메주 즈려 밟듯 먼 바다로 배 띄워가자!” 소금바람에 잔뼈가 굵은 선장의 목소리가 어찌나 걸쭉한지 흥타령에 가깝다. “그래, 이제 드디어 출사를 하는구나. 내 기필코 이번 과거에서 급제하리라. 비나이다. 비나이다. 사해바다 용왕님네, 부디 순풍을 내주시어 뭍까지 한달음에 닿게 하소서.” 제주선
허먼 멜빌은 그의 소설 ‘모비딕’에서 거대한 유령 같은 흰 고래를 추적하는 에이헤브의 선원 이스마엘이 되어 피쿼드호에 몸을 실었다. 이스마엘로 변신해 당대의 고래학과 포경업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남긴 그의 소설 모비딕의 한 구절은 제주의 본풀이와 굿을 헤아릴 때마다 나도 몰래 문뜩문뜩 떠올라 방향타 노릇을 톡톡히 해준다. 그는 소설 속에서 고래의 생태적 특징을 설명하면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고래에게 있어 본능은 신이 내린 지성이다.” 이 구절이 떠오를 때마다 인간이 발명해낸 수많은 문명의 산물 중에 신화야말로 가장 위대한 작품이
지난겨울 전에 없던 북풍한설로 며칠 동안 제주가 마치 북유럽의 설국처럼 눈으로 뒤덮인 적이 있다. 눈이 드문 고장 제주에 몇 년 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으니 동장군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기가 바짝 죽었던지 제주의 어떤 신들도 함부로 어깃장을 들이댈 수 없었나보다.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이 사나흘 넘게 이어지자 문득 열두 가지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요술주머니가 내 손에 있었으면 하는 동심 어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법사처럼 날씨를 조절할 수만 있다면 이놈의 눈보라를 저 북극해 끄트머리로 돌려보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아쉽게도 내 손
어쩌다 TV를 켜고 채널 탐색을 하며 드라마채널들을 살피다 보면 온통 불륜 커플과 사생아 천지다. 어느 드라마를 봐도 똑같은 내용의 연속이라 도대체 어떻게 구별해야할지 당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아예 TV를 꺼버리곤 한다. 엇갈린 사랑의 파국을 낳는 불륜과 질투가 낳은 복수, 고난을 이기고 출세한 사생아의 친부모 상봉, 너무나 식상한 막장드라마가 반복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신화시대의 이야기 속에서도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던 해묵은 테마다.사랑과 질투의 화신으로 유명한 커플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은 당연히 제
제주는 바람의 섬이다. 예로부터 풍재(風災), 수재(水災), 한재(旱災)의 삼다를 말할 때에도 바람을 으뜸으로 쳤다. 제주의 바람은 산과 바다의 합작품이다. 거센 물이랑을 만들며 바다와 함께 달려온 바람이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에 부딪쳐 사방으로 진로를 바꾸는 것이 제주의 바람이다. 천연두의 신 ‘호구대별상서신국마누라’가 침입해 섬뜩한 병마를 퍼뜨릴 때에도 바람을 타고 섬 곳곳을 파고들었다.이처럼 제주의 바람은 따사로운 훈풍이나 보드라운 순풍보다는 서슬 퍼런 칼날을 뽐내며 길길이 망나니 춤을 추어대는 희광이의 칼바람이 많았다. 강요배
지상의 어느 곳에든 갈 수 있고, 어떤 곳에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람일 것이다. 해상의 물결조차도 바람과 하모니를 이루는 것을 보면 바람은 모든 곳에 머무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동서남북 사방팔방에서 자유롭게 넘나들고, 지세에 따라 산바람, 들바람, 강바람, 바닷바람으로 변신하는 바람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보이지 않지만 지구의 숨결처럼 모든 것을 매만지는 바람, 제주토박이들이 눈에 드러나는 바람을 상상해 ‘영등신’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지상의 모든 민족과 나라에서도 같은 생각이 싹
오늘날 제주의 상징이며 삼다 중 하나인 ‘바람’은 천변만화하는 기후현상에 속한다. 지난 회까지는 돌을 테마로 제주의 신화와 전설을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바람으로 대표되는 기후현상을 테마로 삼아 제주의 옛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천상에서 태어난 고귀한 존재였지만 하늘 아래 세상을 그리워해 스스로 지상에 강림한 신이 있었다. 그는 삼위태백으로 내려올 때 3천여 명에 이르는 하늘의 선인(仙人)을 이끌었고, 그들 속에는 풍백, 우사, 운사가 섞여 있었다. 그렇게 지상에 강림한 환웅은 웅녀와의 혼인을 통해 우리나라의 건국시조 단
“누구야 누가 또 생각 없이 돌을 던지느냐~.” 사무치는 상처를 담고 흐르는 애수 섞인 노랫말이 아니다. 저항이라고 해서 80년대 대학가의 매캐한 최루연기 속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짱돌을 이르는 것도 아니다. 새까만 먹돌이든 새빨간 속돌이든 제주의 돌엔 바람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래서 제주의 돌은 생겨먹은 그 자체가 저항과 상처의 숙명을 품고 있다.제주의 현무암은 어떤 이유로 깊은 상처를 지닌 채 태어났을까? 박박 얽은 곰보자국을 남기고 사라지는 천연두의 신 ‘호구대별상서신국마누라’가 사람들의 얼굴뿐만 아니라 지천에 뒹구는
사람들은 누구나 현실에서의 일탈을 꿈꾼다. 매일 반복되는 시시포스의 노역 같은 삶이 고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지루한 탓이기도 하다. 시간이나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이들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도발하거나 새로운 취미를 찾을 것이다. 그럴 엄두가 나지않는 이들 중에는 자신의 삶을 초월한 신화에 빠져들어 세상사를 잠시 잊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물론 도전적인 사람이라면 어려움과 맞서며 현실 속에 자신의 이상향을 만들어낼 것이다. 현실의 이상향을 만들어 내거나 낯선 곳의 일탈을 감행하는 것, 신화적 사실주의는 이 모든 경우를 한
지난 회에 살펴본 하귀1리 바닷가의 수중고인돌처럼 반나절은 물속에서, 다시 반나절은 물 밖에서 풍파와 마주 선 신비한 돌탑들이 제주에 있다. 조천읍 신흥리 바닷가의 ‘큰개답’과 ‘오다리답’등 으로 불리는 다섯 기의 방사탑(防邪塔)들이 주인공이다. 이따금 썰물 때에 맞춰 신흥마을을 찾아 곱게 깔린 금모래 위를 총총거리며 탑 가까이 걸어갈 때면 항상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제주에 흔한 것이 방사탑인데 신흥마을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이런 수중 방사탑을 세웠을까? 당연하게도 그 답은 밀려오는 물결 골골마다 새겨진 제주가 거쳐 온 한 서린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