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과 사증은 1차적으로 우리 곁에 누가 도착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그 필터를 통과해 도착했다 하더라도 국가는 체류자격증으로 이들 중 누가 존엄한 삶을 살 자격을 가질 수 있는지 2차적으로 개입한다. 사람을 향한 차별적 이동의 자유에 이어 국내화 된 차별적 대우를 통해 이상적인 국민사회의 인간상을 (주권의 행사로) 최대한 유치하고 생산한다.(정원을 가꾸는 것처럼 이상적 인간상을 가꾼다.)그렇게 국제적 분배의 불평등은 더 심화되고 이동의 자유는 더 특권화되는 것뿐만 아니라 국민국가 단위로의 인종화효과까지 작동되어왔다. 언제나 국익
나는 존재하지만 가끔 나의 존재는 일상에서 지워진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 ‘국민’재난지원금 등의 사회서비스의 경우,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제공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국민에게만 적용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된 외국인 많고 ‘국민’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외국인’도 적지 않다. ) 하지만 이러한 제도의 이름에도 잘 드러나듯 ‘국민중심’, ‘국민이 먼저다’라는 ‘국민우월주의’식의 인종주의적 가치가 사회서비스의 밑바닥에 깔려있다. 그래서 비국민이 하는 기여 혹은 그들이 내는 세금은 국민우월
법무부는 외국인 등록을 하지 않거나 허용기간을 넘겨 국내에서 살고 있는 국제이주민을 ‘불법 체류자’라고 부른다. 이런 표현은 형사적 범죄를 저지른 자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지양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어왔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불법 체류자’ 대신 ‘미등록 체류자’라는 용어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 국제이주기구(IOM)에서 발간한 용어집(Glossary of Migration)에서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민법을 위반한 자를 형사범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이런 변화를 불러온 노력과 의도를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답답
우리의 일상에는 고민해 봐야할 욕(辱)들이 있다. 특히 존재 자체가 욕이 되는 현상에 주목해보고 싶다. 쉽게 떠오르는 건 '개새끼', '돼지', '병신' 등…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병신’이라는 말은 ‘모자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가진 욕인데, 이런 욕을 하게 되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생각지도 못한 구조적 폭력을 가져오게 된다.병을 앓는다거나 장애를 가진 것은 모자란 일이 아니니까 이 말이 욕이 되는 것 자체가 차별이다. 마찬가지로, 비인간생명체의 명칭을 욕으로 사용하고 욕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도 (부끄럽
이주분야 인권교육 공부모임을 하고 있다. 자료를 읽고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눈다. 지난 번 주제는 인종차별이다. 제주 출신 친구의 동생이 베트남에서 온 친구와 결혼했을 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동네 삼촌들이 결혼잔치에서 신부를 보고 ‘한국사람처럼 생겼다, 예쁘네요’, ‘베트남사람 안 같다, 예쁘고 괜찮네요’ 같은 외모 ‘칭찬’을 아무렇지도 않게 많이 했단다. 흔히 볼 수 있는 피부색, 경제적 차이 등과 연결된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낯설지 않다. 나도 여러 번 들어본 말이기 때문이다. 황색 피부를 가진 나는 여기서 한국
'친구'라는 말은 따뜻함을 준다. 서로 우정을 나눠주는 평등한 관계라는 신뢰와 기대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따뜻한 말로 인식되기 때문에 편하게 많이 사용하는 습관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 친구라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빈번하게 부딪히는 벽과 온도차 때문에 적응이 필요했다. 얼마 전에 유치원에 입학한 도담(가명)이와 함께 등원했다. 다른 어린이와 아이엄마를 만났고, 그 아이에게 "도담아, 같은 유치원에 다니게 될 친구예요. 인사해요!"라고 말을 건냈다. 그러자 선생님이 친절하게 "친구 아니고, 언니예요."라고 알려준다. 그 말을
어색한 행동들을 연습한다. 경계 위에 서보는 일은 경계를 흔들어보는 일이라서 그렇다. 나에게 “제주에 와서 환영해요”라는 말 자체가 그런 일이 된다. 나의 당당함이 부디 그대의 당당함으로, 나의 자연스러움이 부디 그대의 자연스러움으로 마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아무도 힘을 행사하지 않으며 아무도 스스로 힘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연습을 한다.“제주에 와서 환영해요!”라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준 적 있는가? 마치 스스로 자신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말이다.나는 일상에서 (우연히) 만난, 해외에서 온 이주민 친구에게 간단하게
한국사람이 다 됐다.제주에 정착하면서 자주 듣게 된 말이다. 환대의 마음으로 친근감을 표현해주는 말인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거의 10년 동안 “아 그래요? 고마워요”와 같은 반응을 해왔다. 하지만 고마움과 동시에 어색함과 답답함도 내 마음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느낌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대만에서 떠난 후에 늘 시달린 언어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쉽게 말하기 위해서 한동안 스스로 대만사람이라고 소개해왔다. 근데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편했다. “한국사람이 다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을 떠오르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