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동 서쪽 버랭이깍. 옛 기록에는 벌랑포(伐浪浦)라 하였다. 고려 시대까지는 포구의 역할을 하였으나 고려말에 그 역할을 잃었다고 한다. 벌랑이 변음된 ‘버랭이’와 접미사로 끄트머리·아랫부분을 뜻하는 제주어인 ‘깍’이 합쳐진 지명이다. 탑동에서 버랭이깍으로 가는 길은 추억의 장소이다. 대학 시절 연애를 했던 아내와 나는 중앙로에서는 큰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 도로로 따로 걷다가 탑동에 이르러야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좁은 지역에서 소문날까 봐! 그 시절만 해도 추운 겨울날의 탑동은 한산하고 오시록 하여 데이트하기 좋았다.아내의 집이
초등학교 시절에는 탑동 바다를 앞바당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바다가 가까이 있었다. 물때를 맞춰 앞바당에 나가면 주전자 하나 가득 깅이(게), 보말(고동) 등을 가득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먹을 게 흡족하지 않을 때라 깅이나 보말은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다. 잘 삶은 보말을 옷핀이나 바늘, 이쑤시개를 이용해서 까 먹었다. 온 가족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누가 보말을 보말똥까지 꺼낼 수 있는지를 겨루기도 했었다. 그때는 깅이나 보말이 언제나 먹을 수 있었던 일반적인 간식이었는데….(지금은 보말칼국수가 9000원에서 1
주민들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무근성 마을 지도를 보면 용천수인 질아랫물의 위치가 각각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무근성 마을회에서 제작한 마을 소개 자료에는 질아랫물과 기러기물이 같은 용천수로 설명되고 있고,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질아랫물과 기러기물이 각기 다른 용천수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각각 달라서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인터뷰와 사료들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고증할 필요가 있다. 개발로 훼손된 마을 용천수에 대한 자료정리와 함께…. 그림책미술관 시민모임에서
제주목 관아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어사나 중앙관리가 머물던 ‘객삿골’, 서쪽에는 제주진영의 뒤에 있다고 해서 ‘영뒷골’, 사창 터 뒤에 있다고 해서 ‘창뒷골’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영뒷골과 창뒷골을 끼고 있는 성굽길을 기준으로 북·서쪽은 고성(古城)이 있었던 ‘무근성’, 그 북쪽은 ‘탑바래’(탑알, 탑아래, 탑동)라 하였다. 성굽길은 지금의 김판규 외과 건물이 위치한 무근성 7길에 해당하는 곳으로 성벽(城壁)이 있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성벽을 헐어버리고 길을 만들면서 성굽길이라 불렀다. 성굽길 일대는 탐라 시대에는 고성(古
“제주도 사람들은 국수만 먹고 사냐? 가는 곳마다 국수 가게들이 왜 이렇게 많아?”라고 십여 년 전 대학 동창 녀석이 물어본 적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국수 가게가 많아졌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제는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향토 음식 중 하나가 ‘고기국수’일 것이다. 고기국수는 향토 음식이긴 하나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다. 제주 향토음식 보전연구원 양용진 원장에 의하면 “유명세와 달리 고기국수의 유래나 역사는 알려진 바 없고 각종 포털사이트나 백과사전 등에도 온갖 억측만 난무한다. 제주에는 100년 전
제주북초등학교 동쪽, 조선 시대 객사 대청이었던 영주관 터.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왕명을 받들고 오는 관리들을 접대하고 묵게 하였던 곳이다. 영주관의 설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89년(숙종15) 이우항 목사가 다시 고쳐 지었고 그 뒤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고 한다. 제주공립보통학교(제주북초등학교 전신)가 1908년 이곳으로 옮겨져 영주관을 교실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도 영주관 터에는 교사(校舍)가 있었지만, 그 후 철거되어 전매청(KT&G 전신)건물이 세워졌다. 전매청 이전 후 2013년~20
제주북초등학교는 제주교육의 발상지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통감정치가 본격화되던 이듬해 ‘보통학교령’이 공포되면서, 1907년 5월 19일 ‘제주관립 보통학교(4년제)’가 개교하였다. 바로 이곳이 현재의 제주북초등학교 터전이다.“1895년 7월 2일 ‘소학교령’ 공포로 ‘제주목 공립소학교’가 1897년 4월 신학기에 맞춰 개교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목 공립소학교는 소규모 학교로 1학급의 극소수 학생으로 1896년 11월 10일 전석규가 교원으로 임명되었고, 제주 관찰사이며 제주목 재판소 판사였던 이병휘가 학교장을 맡았다.
도시재생사업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다. 제주도에서도 제주시 원도심이 가장 큰 규모로 재생사업을 시작하였다. 2017년 2월 8일에는 재생사업의 마중물 사업인 관덕정 광장 조성사업에 대한 주민설명회가 있었다. ‘차 없는 거리 조성계획’이 지역 주민들에게 쟁점이 되면서 열리게 된 것이다.총사업비 200억이 투입되는 원도심 재생사업 중 ‘차 없는 거리 조성계획’은 2016년 9월부터 2020년 말까지 국비 20억원, 지방비 45억400만원 등 총 65억400만원이 투입되는 규모 있는 사업이었다. 주민설명회에 참석한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
지난 회 칼럼을 읽고 원도심에 사셨던 지인께서 소중한 사진 자료를 보내주셨다. 제주목 관아 복원으로 철거된 18개 동의 건축물들을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인 것 같다. 사진 좌측의 건널목 위에 있는 건물이 관덕정이다. 철거 전의 법원, 검찰청, 보건소, 세무서, 경찰국 등의 건물이 보인다. 우체국 동쪽 건물은 철거 후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건물에는 대성학원과 심지 다방이 들어서 있었다. 이 공간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면 숨은 그림을 찾듯이 찾아보길 바란다.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우체국 앞에는 탐라국의 전통을 이어온 '성주
나의 어린 시절, 제주목 관아지는 법원, 검찰청, 경찰서, 세무서 등 18개 동의 건축물이 모여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제주 정부종합청사보다도 더 많은 공공기관이 제주목 관아지에 있었던 셈이다. 검찰청과 경찰서가 있어서 그런지 그 앞을 지날 때면 왠지 무섭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법원과 검찰청은 1972년 12월에, 제주경찰서는 1988년 10월에 광양으로 옮겨갔다. 공공기관의 이전이 원도심의 공동화를 재촉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법원과 검찰청이 이전한 빈 건물에는 민간이 운영하는 사업장들이 들어섰다. ‘오도관’이라는 태권도장
성안(제주 원도심) 토박이가 마실을 다니듯 제주도 최초의 터를 찾아다닌다. 사라져 버린 것, 남아 있는 것, 사라질 것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주민들이 만들어 가는 원도심 도시재생의 방향성을 찾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남아 있는 것:관덕정과 벽화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물 제322호이다. 세종 30년 제주 목사 신숙청이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기 위해 지었다는 기록이 에 남아 있다. 건물 내부 대들보에는 당시에 그려진 십장생도(十長生圖),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