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언제 이곳을 할퀴고 갔냐는 듯 물장오리 화구호는 가을분위기가 물씬하다. 물장오리로 가는 길, 숲길을 지나 꾸불꾸불 골짜기를 두세차례 건넜을까? 비탈이 무척 가파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통은 잠시일 뿐이다. 높고 푸른 하늘, 길섶의 풀벌레 소리, 하늘거리는 들꽃에도 잠시 눈을 뺏기고 어느새 마음이 넉넉해진다.

특히 ‘물장오리’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오름 정상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고여 있다. 기분마저 한결 상쾌하다.

물장오리는 5·16도로를 타고 제주시와 북제주군의 경계에 있는 물장올교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을 놓고 볼 때 제주시 봉개동에 해당된다. 해발 937m, 늪이 있는 곳은 해발 900m가량 된다.

정상의 물이 괸 화구호 크기는 400m 남짓. 화구호의 바깥둘레는 1500m나 된다. 물찻(검은오름)·동수악(東水岳)과 더불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몇 안되는 화구호가운데 하나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를 반증하듯 충암 김정(沖菴 金淨·1520 유배)선생의 기우축이 눈에 들어온다.

물장오리는 국립공원 구역 안에 들어있고 등산로가 아니기 때문에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로부터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자연환경 보전 때문만은 아니다.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화구호로 향하는 길은 단풍나무·서어나무 등 울창한 낙엽수림지대를 이루고 있고, 이 낙엽수림지대를 벗어나면 찔레덩굴·보리수나무·조릿대군락이 전개된다.

정상의 굼부리는 접시모양을 하고 있다. 금새우난, 구잎약난초 등이 서식하며, 항상 물이 고여 있다.

물장오리는 오름을 형성하고 있는 용암류가 멀리까지 흐르지 않고 주변의 기반만을 형성한 결과, 기반이 두터워져 분화구 안에 물이 고이게 되었다고 한다.

물장오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한라산 백록담 북쪽에 자리잡은 장구목이나 왕관릉에서 봐야 한다. 태역장오리, 살쏜장오리, 불칸디오름과 같은 비슷한 크기의 오밀조밀하게 밀집돼 있는 모습이 형제들이 나란하게 서 있는 것처럼 정겹게 느껴진다. 이 네 오름을 통칭해 장오리 또는 장올악(長兀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라산·오백나한과 더불어 예로부터 섬사람들이 3대 성산(聖山)으로 신성하게 여겨온 물장오리는 설문대 할망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물장오리는 일명 ‘창터진 물’이라고 해서 거신(巨神) 설문대 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곳이다.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용연물이 깊다기에 발을 담가보니 발등 밖에 되지 않았지만 물장오리에 와서 성큼 들어서니 설문대 할망이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간 채 사라지고 말았다는 게 전설의 골자. 물이 얼마나 깊었길래 신조차도 빠져 나오지 못했을까.

물장오리는 그러나 근래들어 수중 생태계에서 육지 생태계로 옮겨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제주환경운동연합 관계자는 “최근들어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어 화구호 길목인 북쪽지역에는 건조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장오리 화구호의 남·북·서쪽에는 ‘골풀’ 등의 습지식물이 완전히 뿌리를 내렸고 동쪽에는 가장자리에만 물이 깊어 ‘세모고랭이’등의 서식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물장오리 화구호의 자연환경을 살리는 길은 완충지대를 보호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

세모고랭이는 늪이 형성돼 있는 것에 서식하는 대표적인 습지식물이다. 높이는 50~120cm이며 구토·통경 등에 약재로 쓰기도 한다.

또 늪과 수림지대를 구분하는 완충지대에는 찔레덩굴과 돌가시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제주환경운동연합은 지난 97년 생태조사를 통해 이 일대에 소금쟁이·송장헤엄치게·노랑실잠자리(이상 곤충류), 도마뱀(파충류), 미꾸리(어류)등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미꾸리는 물이 고인 늪이나 논·연못 등 진흙이 많은 곳에 산다. 오염이나 수량의 증감에도 잘 견디며 몸길이는 17cm내외이고 검은색을 띤다.

오름의 정상, 화구호 밑바닥에 미꾸리가 살고 있다하니 이 얼마나 신비한 일인가.

그러나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물장오리의 경우에도 개발바람에 밀려 심한 속앓이를 하고 있다.

70년대에 제주컨트리클럽에서 물을 끌어가기 위해 설치해 놓은 콘크리트와 철근 등의 수로가 앙상하게 몰골을 드러내 있었고, 화구호 주위에는 취사 흔적과 빈 소주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산업용수로 쓰기 위해 물을 끌어 써놓고 그 이용 가치가 사라지자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방치해 놓은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화구호 인근 주목들의 가지들은 한 눈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인위적으로 휘어져 있었다. 분재용으로 키우기 위해 주목의 가지를 일부러 휘어 놓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 환경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호사가들이 점찍어 놓은 이들 주목은 얼마 안 있으면 안방과 정원 장식용으로 몰래 팔려갈 것이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물장오리의 영험마저 안중에 없는 듯 하다. 환경 훼손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일부 무속인과 불법 도채꾼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지고 있다.

그들에게 절대보전지역이며 ‘자연을 훼손하지 말자’는 팻말은 헛구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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