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허한 것들
다 날려 보내고
너는 이 세상
모든 자리를 비워두었구나

구름이 머물다 간
하늘처럼
네 속의 온갖 아픈 무늬
너를 채우고 있는 것을 보겠구나

너를 채워
바람의 집을 짓는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새떼의 행방을 쫓다보면

………<후략>………
- 한기팔 시집 「말과 침묵사이」에서 -

<지은이>  한기팔(1937~ ) 서귀포시 보목동 출생
 1975년 「심상」지 신인상(박목월 추천) 당선 등단
 시집으로 「서귀포」외 5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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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가 옷을 벗는다. 그 무성했던 잎새들 모두 떨구어내고 이제 뼈같은 비인 가지로 허공중에 서서 바람을 치고 있는 것이다.

생동의 푸른 날들 다 날려보내고 동면의 기인 꿈을 안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인가. '네 속의 온갖 아픈 무늬/ 너를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비워내는 겨울나무 '바람의 집을 짓는' 그 빈 몸안에 시인은 또 다른 그 무엇을 채우고자 함인가.

평생을 시를 지키며 살아온 사람. 고적감과 허무감을 시로하여 버티어온 시인은 이제 조용히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존재의식을 길어올리고 있다.

또 새로운 기운과 생명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겸허와 순응의 자세를 일관해온 시인의 삶의 과정을 느끼게 한다.<글=김용길 시인, 그림=강부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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