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TV의 ‘해신’이 최근 가파른 시청률 상승세를 타고 있다. 빠른 속도감과 화려한 액션 신으로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 드라마는 최인호의 소설 ’해신‘을 원작으로 한다.

2002년 중앙일보에서 1년동안 연재됐던 소설 ’해신‘은 작가의 노력과 특유의 상상력으로 학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밝혀냈다. 더불어 배우들의 열연, 화려한 비주얼적인 측면, 원작보다 부각되는 인물들의 갈등과 애정관계 등을 통해 드라마 ‘해신’이 시청자 공략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 대해 불만스러운 게 좀 있다. 장보고의 무대 배경 때문이다. 중국 양주와 지금의 광주(무진주), 완도(청해진)이 주무대다. 당나라에 신라인 사회를 하나의 네트위크로 엮고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했던 그가 과연 제주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을까?

# “眈淨羅(탐라)의 상선(商船)이 광주(廣州)에 폭주한다”

제주사람들은 바다와 더불어 살아왔다. 제주의 선민들은 갈아먹을 땅이 척박해 농사와 함께 어로작업에 의존해 생계를 꾸려왔다. 그 중심에 포구가 있다.

포구는 특히 교역의 중심지로 터 잡았다. 제주와 다른 지역과의 교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는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BC 58년께의 일이다. 탈해왕 2년때 탐라 고선주(高善主)왕은 신라에 사자를 보내 즉위를 축하했다. 또 「BC 20년 신라의 호공이 탐라의 산천지형을 둘러보고 돌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1백50년께는 삼국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크게 발달,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343년 탐라의 조공선(租貢船)은 신라로 가다가 그만 태풍을 만나 일본 오끼나와 중산도(中山島)에 표착한 일이 있다. 또 「480년 탐라의 고담왕은 양탕과 부계량을 신라에 사자로 보내 만물을 바쳤다」고 전해진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誌) 탐라현수(耽羅懸修)를 보면, 고을라(高乙那)의 제15세 손(孫) 고후(高厚)·고청(高淸)·고계(高季)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다」고 한다. 탐진은 지금의 전남 강진이다.

또 「신라에 입조(入朝)함에 신라왕이 고후에게 성주(星主), 고청(高淸)에게 왕자(王子), 고계에게 도내(徒內)의 호(號)를 주었다」고 씌어 있다.

중국과의 교류도 엿볼 수 있다. 1928년 산지항 방파제 공사 때 채석장 석산(石山)속에서 전한시대의 오주전과 고경(古鏡), 그리고 왕망시대에 처음 주조된 동으로 만든 화폐인 화시(貨市)와 화천(貨泉)이 출토돼 눈길을 끌었다.

이는 「제주 선민들이 2000년 전부터 해외교역을 했다」는 옛 문헌의 기록을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89년 수(隨)의 적선(敵船) 1척이 태풍으로 탐라에 표류했고 이때 탐라의 고삼(高參)왕이 이를 구조, 백제를 통해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당나라 동이전(東夷傳) 담라조(條)(담라=탐라)에는 「661년 탐라왕이 사자를 보내 입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탐라는 해외교역이 빈번해짐에 따라 「건들개」(건입포=산지포)의 내항으로 고령포(高齡浦)를 설치했다. 이곳은 지금의 남수구 동쪽에 해당한다. 당선(唐船)들이 정박함으로써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로 터잡았다.

한유서(漢愈書)는 「眈淨羅(탐라)의 상선(商船)이 광주(廣州)에 폭주한다」고 했다.

탐라가 광동(廣東)까지 가서 교역을 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 또 「탐라의 선박은 크고 단단했다」고 해 당시 탐라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음을 엿볼 수 있다.

# 장보고와 법화사, 그리고 당캐

서귀포시는 지난달 법화사(法華寺) 대웅전과 천지연 `생수궤', 강정마을 `논다루는 소리' 등 모두 9건을 향토유산으로 지정했다.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법화사지는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의한 ‘장보고 창건설’이 대두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곳이다.

특히 지난 1990년 법화사 발굴사업 과정에서 법화사와 인접한 대포(大浦)포구에서 법화사지와 비슷한 주춧돌이 발견됐다.

대포의 옛 이름은 ‘당포(당캐·唐浦)’다. 당나라와 교류했던 포구라는 구전도 있다. 더욱이 법화사는 중국 산동반도의 법화원, 완도 상황봉의 법화사와 함께 법화사상에 기초한 관음신앙의 사찰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물론 아직까지 이를 증명할 결정적인 자료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추론은 가능하다. 앞서 거론한 바 산지포과 당나라와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점, 탐라가 광동(廣東)까지 가서 교역을 했으며, 탐라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다는 점, 그리고 현실적으로 장보고의 국제해상네트워크의 중심에 제주도가 지리적으로 중심에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결정적 단서인 고고학적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을 뿐, 직.간접적으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 21C 청해진…세계 평화의 섬, 제주

지난 2003년 5월의 일이다. 장보고와 관련해 뜻 깊은 행사가 마련됐다. 1200년 전 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국내 무역항로를 돌아보는 해상 탐사활동이 실시됐다.

전남 완도군은 장보고 관련 국내외 학자와 일반인 등 200여명으로 구성된 ‘해상왕 장보고 무역항로 탐사대’가 2박3일 일정으로 목포해양대학교 실험선 ‘새유달호’를 타고 2000리 해상 탐사 길에 나선 것이다. 탐사대는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청해진 본영을 출발, 장 대사의 일본교역 기착지였던 서귀포의 법화사와 중국항로의 전진기지였던 신안군 흑산면 홍도, 주요 교역품이었던 해남·강진군 등지의 청자 도요지를 돌며 장 대사의 흔적을 추적했다.

학계 일각에선 이미 제주의 법화사와 당포를 당시 일본교역의 기착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2004년 6월에는 제주해양연맹(회장 고유봉 제주대교수)가 ‘해상왕 장보고와 제주도’를 주제로 한 제1회 제주해양포럼을 개최했다.

당시 포럼에선 고유봉 교수의 ‘장보고의 활동무대, 그 해양학적 특성’, 조범환 서강대 교수의 ‘신라 하대 무진주 지역 불교계의 동향과 쌍봉사’ 등 4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김일우 제주문화예술재단 연구사는 논문 ‘제주사람들의 해상활동과 그 유형-고려시대 이전을 중심으로’를 통해 “제주는 황해와 남해, 동중국해를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의 접점으로서 남중국과 한반도 및 일본열도를 잇는 삼각형의 중핵에 위치한다”면서 “유통 및 교류공간과 통로로서 바다의 역할이 증대되는 시점에서 제주가 동아시아 지역 해양항로의 센터이자 물류체계의 거점지역으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 1월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함으로써 ‘21C 청해진, 제주’의 꿈이 무르익고 있다.

물론 상황은 장 대사 때와 좀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공통점은 유통 및 교류공간의 통로로서 바다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제주도가 동북아의 제네바로서 국제외교의 장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아울러 세계평화의 섬 지정이 제주국제자유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각종 국제회의 및 투자유치에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될 수 있도록 각종 후속조치와 지역 현안에 대한 정부와의 공조체계가 강화되고 있다.

지금 4.3 추모행사가 한창이다. 평화선언문이 채택되고 화해와 상생을 바탕으로 평화의 큰 길로 나가자고 한다.

비극의 역사를 딛고 제주국제자유도시, 세계 평화의 섬, 21C 청해진으로 제주가 도약할 수 있도록 도민들의 결집된 힘이 무엇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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