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올라가 버린 푸른 하늘. 한해를 마무리짓는 가을의 끝. 가을이 깊어지자 산 속의 바다도 깊어졌다. 능선마다 출렁이는 억새의 물결. 한라산의 가을은 온통 억새밭이다.

이른 아침, 제주시에서 동부관광도로를 타고 남원읍 수망리 물영아리로 가는 길에 취재팀은 영롱한 아침 이슬을 맞아 반짝이는 억새군락을 봤다. 장관이다. 늦가을의 마지막 향기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표고 508m의 물영아리는 2000년 12월 11일 전국 처음으로 습지보전법에 의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우리나라 습지보호지역 1호다. 지정면적은 30만9244㎡. 산꼭대기에 습지가 형성된 특이한 곳이다.

‘생태계의 보고(寶庫)’란 이름에 걸맞게 120㎝가 넘은 유혈목이와 대륙유혈목이·쇠살모사 등 독사와 노루·오소리 등 야생동물, 성새우란·큰천남성·곰취 소군락·고마리 군락·물고추나물·뚝새풀·세모고랭이·보풀 등의 식물을 고루 갖추고 있는 오름의 진면목도 볼 수 있다.

습지보전지역 지정에 앞서 한국자연보전협회와 환경부 생태조사단은 지난 98년과 99년에 물영아리에 대한 식생 조사를 통해 세모고랭이 등 습지식물 171종과 양서·파충류 15종, 곤충 47종이 서식하는 것을 확인했다.

당시 동행 취재를 했던 EBS는 환경프로그램 ‘하나뿐인 지구, 섬 위의 섬-제주의 원시 늪’ 프로그램을 통해 개구리를 토해내는 뱀의 모습, 소금쟁이가 자신보다 세 배나 더 큰 개미를 공격해 잡아먹는 모습, 대륙유혈목이(뱀의 일종)가 나무를 타는 모습, 잠자리 애벌레가 새끼 도롱뇽을 공격해서 잡아먹는 모습 등을 생생하게 보여줘 큰 관심을 모았다.

살모사·쇠살모사·까치살모사와 무자치(물뱀)는 난태생이다. 새끼를 뱃속에서 키워 알 상태로 분만을 한다. 새끼는 곧바로 껍질을 깨고 돌아다니는데 어미는 지쳐서 꼼짝 않고 있으니까 새끼들이 어미를 죽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살모사라는 이름은 잘못된 것이기는 해도 어떤 면에서는 생태를 눈여겨보고 지은 것이다.

마침 옴개구리 한 마리가 잡혔는데 등에 난 돌기를 손으로 비비니 거품을 내뿜었다. 독이다. 옴개구리가 개체 수를 유지하는 것도 독이 있어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참개구리는 이제 논을 떠나 풀밭으로 삶터를 바꿨다. 머리에서 꽁지까지 등 가운데 연한 색의 줄이 달리고 있다.

제주도의 조사에 따르면 제주지역의 오름 368개 가운데 백록담처럼 산꼭대기에 화구호를 갖고 있고 지형·지질이 특수하거나 경관·생태학적으로 우수한 기생 화산은 9개 정도이다. 그 가운데 물영아리 오름은 제주도 기생화산의 대표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데다 전형적인 온대 산지 늪의 독특한 생태계를 잘 간직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크다.

특히 습지의 천이과정을 제대로 알 수 있어 자연사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탄층(泥炭層)이 폭넓게 형성돼 있다.

물영아리 오름은 겉 둘레가 약 1㎞이고 화구호는 둘레 300m·깊이 40여m에 달하는 함지박 형태. 현무암질 용암이 분출해 생긴 기생 화산이며 오름 안팎에는 ‘송이’라고 불리는 화산 쇄설물이 널려 있다.
화구호의 물은 빈약했다.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못 중앙으로 나아갈수록 마른 수초로 덮여 누르스름한 못 바닥은 한발 내디딜 때마다 푹푹 빠질 정도였다.

취재팀이 고마리로 뒤덮인 땅거죽을 힘껏 밟으며, 퇴비(?)더미 위에 서자 몸무게에 탄력이 붙어 바닥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다.

물영아리는 건조기 때 습지를 형성하다가도 집중호우가 내리거나 장마철이 되면 수위가 1m까지 올라간다. ‘물영아리’라는 지명도 ‘비가 내리면 물이 고여 연못이 된다’는 데에서 비롯됐다.

화구호 주위에는 습지 식생인 보풀과 세모고랭이·고마리 등이 원을 그리며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 물여뀌·가막사리·넓은잎미꾸리낚시·개기장·모기방동사니·누운기장대풀·골풀·네모골 등이 자란다. 특히 물여뀌는 물속과 습지 주변에서 동시에 자라는 식물로 현재 경남 창녕의 우포늪과 울산 주변 습지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식물로 알려져 있다.

분화구 안쪽 경사면에는 참식나무·꽝꽝나무·줄사철나무·참꽃나무 등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고, 간혹 복수초와 곰취도 눈에 띈다.

오름의 바깥쪽 능선부에는 참식나무와 서어나무가 고루 자라고 있다. 능선 초입부에는 70년대 조림 사업 때에 심은 삼나무가 빽빽했다.

환경부 생태조사단 연구에 따르면 능선부 주변에는 제주도와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덩굴 용담이 퍼져 있다. 이 오름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 가운데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으로는 제주도에서만 자라는 새끼노루귀·제주피막이·참꽃나무·방울꽃, 거제도와 제주도에만 있는 개승마를 꼽을 수 있다.

수망리 청년들은 지난 99년부터 ‘물영아리 오름 환경감시단’ 활동을 펴고 있다. 현재 마을 청년 38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물영아리 오름 보호에 나선 것은 지난 99년 환경부가 마련한 지역주민 공청회가 계기였다. 물영아리 오름 꼭대기가 국내에서 유일한 분화구 습지인 데다 희귀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었다.

게다가 사람의 출입이 자유로와 이들 희귀식물을 몰래 채취해 가는 사례를 많이 봐 왔기 때문. 환경부 지정 보호야생동물인 물장군 등 수많은 곤충도 인간의 발길에 피해를 입고 있다는 학자들의 설명도 이들의 활동에 자극제가 됐다.

최근에는 물영아리 인근에 들어서게 될 자동차 경주장 조성사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경주장에서 발생되는 소음과 진동 등이 습지생태계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 회원들은 “자동차 경주장이 들어설 경우 물영아리의 습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들을 환경영향 평가과정을 통해 예측·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여환경연대는 보고서를 통해 “물영아리 오름 600m∼1㎞반경에 자동차경주장 시설물이 조성되면 ▶지하수개발에 따른 습지용수의 유출과 ▶차량소음·진동, 배출가스·유류 등으로 인한 생태계교란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주장했다.    

크게 보면 개발은 보존만큼 중요하다. 환경을 보존하는 개발은 또 하나의 보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므로 후손에게 맡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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