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제주4.3에 대한 공식 사과에 이어 제주도민과 천주교인들이 '화해를 위한 미래선언' 채택으로 한(恨)이 서린 땅 제주가 또 다른 역사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번 공동선언문 채택은 100년 넘게 '민중항쟁'과 '신축교난(敎難)'이라는 학계 및 사계와 천주교계간의 현격한 시각 차이를 빚어왔던 제주민란('이재수의 난')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도민의 항쟁 등의 시각에서 보는 역사학계.사회단체와 당시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천주교계가 공동으로 나서서 역사적 화해에서 한걸음 나아가 문화.종교적 화해까지 시도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특히 올해 '제주항쟁’(이재수의 난) 발생 102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학술대회를 통해 '화해와 기념의 미래선언'을 대외적으로 선포, 향후 상호 존중의 기조 위에서 과거의 잘못을 서로 반성하고 모두 다 같은 제주 공동체로서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취지를 명백히 밝혔다.
 
특히 이들은 "102년 전 이 땅 제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제주 공동체 모두의 경험과 해결과제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며 "지나온 시기에 각자 다른 입장에서 평행선을 그려왔던 사건의 평가를 접어주고 서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관용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밝힌 것은 제주가 화해와 상생을 위한 평화의 섬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박찬식씨(43.제주대)는 "제주근현대사에서 공동체 분열을 가져왔던 두 사건 중 하나인 '4.3'이 대통령의 사과로 공식성을 인정받은데 이어 100년전 제주항쟁이 화합과 상생의 정신으로 공식사과를 한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며 "'기억 외면'에서 '기억 충돌'로 갔던 시대를 접고 '기억 화합'을 천명한 것은 근현대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일로 평가할 만 하다"고 말했다.

▲ 천주교인과 도민의 화해가 있기까지

2001년 12월 초 제주에서는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공동대표 김영훈·김창선)와 천주교 제주교구(당시 교구장 김창렬)가 공동주최하고 제주도사연구회와 역사학연구소가 주관한 '진실과 화해'를 주제로 한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연 바 있다.

당시 각계 참석자 100여 명은 "그 간의 갈등을 씻고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 역사적 흔적지에 '화해의 탑'을 세우고 도민과 천주교계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선언문'을 만들자"고 제안했었다.

이 때 한말 한반도와 제주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재수난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지만 공식 화해의 '열매'까지는 거두지 못했다.

참가자들은 당시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 관점에서의 깊은 연구와 논의도 필요하지만 생명 존중의 인식하에서 서로 화해하는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이 과정에서 서문천주교회 임문철 신부는 "학계와 도민들이 천주교와 함께 공동 연구회를 꾸려 올해 안으로 화해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선포하자"고 제기했었다.

또 문창우 신부(천주교 제주교구 교육국장)는 발제문을 통해 "신축교안 당시 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인지, 종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는 과연 종교적 행위를 표현했는지 반성이 요구된다"며 "종교가 폭력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종교를 잘못 이해한 데서 생긴 것"이라고 '바티칸 2차공회의'의 관점에서 신축교안에 대한 신학적 반성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당시 참석한 소설가 오성찬씨는 "천주교 공동묘지가 들어선 황사평이나 대정삼의사비 등의 역사적 흔적지에 '화해의 탑'을 세우자"고 제기, 공동 기념물에 대한 중요성을 처음 언급하기도 했다.

한편 두번째 기념행사 참가자들은 오는 16일 100여년전에 천주교도들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관덕정'과 민군들이 집결했던 당시 제주읍성 내 '황사평', '대정읍 삼의사비'가 있는 대정성지 및 대정향교 등 당시의 역사적 현장을 돌아보는 '이재수 난의 발자취를 따라서'를 주제로한 역사기행에 나선다.
 

▲ '화해와 진실'에 쏠린 눈.

▲  1901년(신축년)  '이재수의 난(亂)'이란

19세기가 끝나 20세기가 시작된,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에 제주에서는 중앙 왕실에서 파견한 봉세관(捧稅官)의 조세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저항한 도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인 수백 명(500-700명)이 목숨을 잃고 민란에 참여했던 민중들도 죽음을 당하는데 이를 이재수 난 또는 신축교난(敎難)·교안(敎案)이라고 부른다.

이재수 난은 천주교도들과 제주도 민중 사이의 충돌이 총을 든 전쟁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가져오고 프랑스와의 국제적인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된 제주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제주민란(民亂)과 신축교난(敎難)이라는 용어가 함께 불리는 이유는 세금징수와 관련된 학정과 천주교회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당한 봉기였다는 시각과 수백 명의 천주교도가 피살됨으로써 교회가 수난(박해)을 입었다는 평행한 시각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시각의 차이는 당시 사건의 장두(狀頭) 역할을 했던 '이재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학계는 민족주의와 민중사관의 입장에서 반봉건, 반제 항쟁으로 보는 의견이 주류를 형성하는 가운데 향촌 사회 내부에 대한 분석과 함께 이재수 등 지도부의 '사(士)' 의식 추적 등으로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당시 반식민지적인 한반도 정세하에서 프랑스 천주교의 교세확장과 그에 따른 폐단, 광무 정권의 조세수탈이 강화되는 시기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제주민중운동사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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