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후 4시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열린 1901년(신축년) 제주항쟁 102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는 제주항쟁에 대해 "지방사.향토사의 관점을 갖고 제주민중의 시각으로 봐라봐야 한다"는 의견이 폭넓은 공감대를 이뤘다.

 지방사.향토사 관점 중요

'역사적 기억과 화해'를 주제로 한 박찬식 역사학자는 "당시 제주민중들은 기존의 향권을 위협하는 외래적 요소인 천주교에 대해 사회경제적,문화적,종교적 반감이 작용하고 있었다"며 "특히 사회 세력화된 천주교회는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토착세력을 상당히 위협함으로써 심하게 배척받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제주민중은 당시 세금 징수의 폐단과 교회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정당하게 봉기한 항쟁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민란을 주도했던 이재수의 희생을 기려 '이재수의 난'으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천주교인도 제주민중이란 틀속에서 똑 같은 희생자"라며 "제주민중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당시 문화.종교적 차에 의한 사건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인측 , '반면교사'  삼아야

'한말 천주교와 제주전통사회의 만남-「수신영약」(修身靈藥)을 중심으로'에 대한 주제발제를 한 문창우 신부(제주교구청 교육국장)는 "제주도에 부임한 초창기 가톨릭 성직자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김원영 신부가 1900년에 저술한 「수신영약」은 제주도의 토착종교 및 민간신앙에 대해 비판하고 그에 대해 가톨릭의 교리가 올바름을 내세우는 형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1901년 신축교안의 배경을 교인 입장에서 밀도 있게 담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문 신부는 "하지만 한국사회 안에서 특정 종교가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대화의 길을 찾는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신축교안 당시 폭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제주도 문화와 종교(그리스도교)의 만남이 되지 못했다는 표시"라며 "신축교안이 발생하는 계기를 준 일부 교인들의 태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분명 아니었다"고 밝혔다.

또 문 신부는 "교인들 역시 양대인 선교사에 의지해 다양한 정치, 사회, 경제, 법률적 특권을 행사했다"며 "사실 많은 이가 교회를 위해 죽었지만 진정 교회도 제주도(문화)를 위해 죽었는가를 되물어야 할때"라고 밝혔다.

'프랑스 정부 공식 사과해야' 

'제주항쟁 기념사업,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발표한 박경훈 제주민예총 부지회장은 "향토사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면도 있겠지만 제주항쟁은 반봉건.반제국주의의 성격이 강했다"며 "당시 팽창주의 정책의 일환에 있던 프랑스에 대한 정부 공식 사과도 받아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기념사업문제와 관련해 "교수형에 처해진 장두 등의 유족과 후손에 대한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며 "아울러 유적지 발굴과 복원의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유족과 후손에 대한 명예회복 문제와 관련해 "'일제의 국권침탈(1885년) 이후…’로 규정된 독립유공자 예우에 대한 법률의 유권해석이 일제가 아닌 외세에 항거한 순국자로 확대돼야 한다"는 시각을 새롭게 제시했다.

'신축항쟁 기념관 짓자'

이와함께 "역사적 진실과 사실의 복원을 위한 '신축항쟁 기념관 조성'과 함께 '프랑스 정부의 사과'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자 제주출신 김영범 대구대 교수는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적 측면을 강조하며 단지 민족사적 관점으로 확대해 신축항쟁을 본다면, 토착전통문화 침탈에 대항한 향토사적 의미가 상당 부분 축소될 수도 있다"며 "제주민중사의 입장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2001년 100주년 기념 사업 당시 '화해의 탑'을 세우자고 공식 제안했던 소설가 오성찬씨는 이날 '화해'에 대한 상징조형물을 다시 제안했다.

오 씨는 "100여년전에 천주교도들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관덕정' 또는 지금은 천주교 공동묘지가 들어섰지만 당시 민군들이 집결했던 제주읍성 내 '황사평' 등 역사 유적지에 상징 기념물로 '화해 탑'을 세우자"고 전안해 모든 참석자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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