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13일 금요일.

일상적인 관념 속에서 우리는 13이라는 숫자는 어딘지 모르게 개운치 못한 여운을 남긴다.

서양에서는 손님을 초대할 때에도 13명은 안되며, 이미 초대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한 식탁에 앉히지 않는다.

서양의 민간에서 13은 악마의 숫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만약 누군가가 13가지의 일을 모두 추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부주의한 사람으로 취급되며, 쓸데없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13은 주소로 사용될 때에도 사랑받지 못하는 숫자다. 호텔에서 13이라는 호수를 달고 있는 방은 대개 창고로 쓰인다.

동화 '잠자는 공주'를 보면 13번째 요정이 파티에 초대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명백히 13번째 요정이 화를 불러 올 것이라는 사람들의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 인해 이 요정은 초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파티에 참석해 저주를 퍼부었다.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13일을 가장 멀리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날은 금요일이다.

예수는 처형 전 제자 12명과 함께 만찬을 하던 중 유다에게 배반을 당해 잡혀갔다.

13명이 모인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13은 하계를 상징하는 숫자였다.

우리는 수많은 고대 달력에서 13번째 달이 위험을 몰고 오는 윤달로 표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13일의 금요일에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왕성한 활동을 한다.

여중생 심미선·신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날은 2002년 6월 13일 금요일이었다.

2000년 10월 13일 금요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같은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려대에 특강을 하러 갔다가 학생들로부터 교내 출입을 봉쇄당하는 변을 당했다.

13이라는 숫자는 이렇듯 꺼리는 숫자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13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 볼 필요성도 있다.

즉 어떠한 특정한 맥락에서 13은 비록 위험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나 희망의 숫자이며 미래의 숫자로 변보하기 때문이다.

동화 '열세명의 형제'에는 12명의 아들을 가진 왕이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왕비가 임신을 하게 되자 왕은 태어날 아이가 딸일 경우 열두 아들을 모두 죽일 것을 명령한다.

태어날 딸에 대한 왕의 사랑이 너무나도 지극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는 아들들이 차지할 자리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탈무드에는 "그 언젠가 이스라엘 땅은 열 세 부분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열세번째 땅은 바로 우리의 군주이신 메시아의 땅이다"란 문구 있다.

이 문구의 이면에는 명백하게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딴 이스라엘 열두 종족에 대한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교황그레고리우스는 열두명의 빈민들을 불러 식사를 함께하면서 "가난한 자 열둘이 여기 그레고리우스의 식탁에서 접대를 받았으니 그들 곁에 천사가 열세번째 손님으로 고요히 서 있었네"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빛이 그토록 많은 저주를 받아온 숫자위에 떨어지는 것을 알수 있다.

즉, 하필이면 13이라는 숫자가 구원을 가져오고 신성함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숫자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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