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가 끝나 20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인 1901년(신축년) 제주에서는 중앙 왕실에서 파견한 봉세관(捧稅官)의 조세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저항한 도민 봉기가 일어났다.

소위 '이재수 난'으로 불리며 천주교인 수백 명(500-700명)이 목숨을 잃고 민란에 참여했던 민중들도 죽음을 당한 이 민란은 그후 100여년 흐른 즈음에야 활발한 재조명 작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판결문 수록

최근 1901년 제주항쟁 기념사업회(회장 김영훈 김창선)가 당시 법원인 민군지도부에 대한 평리원의 판결문과 제주목사의 보고서 등을 번역.수록해 '신축제주항쟁자료집1'로 묶어냈다.

정부의 공식문서 중심으로 엮은 이번 자료집에는 김윤식의 유배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와 새로 발굴된 고문서 '삼군교폐사실성책(三郡敎弊査實成冊)'과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1901년 7월) 등도 수록했다

평리원 판결문 서두에 기술된 '전남 대정군 거주 전 향장 오대현(나이 27)', '전남 대정군 거주 이강 이재수(25), '전남 대정군 거주 이강 강우백(41)', '전남 제주목 거주 머슴 김남혁(34)', '전남 대정군 거주 목수 조사성(29)', '전남 대정군 거주 뱃사람 고삼백(36), '전남 영암군 거주 장사꾼 마찬삼(50)'등 10명의 표기가 눈길을 끈다.

제주에서 유배생활 중 1898년 '방성칠란'과 1901년 '이재수란'을 겪으면서 사건에 관련된 일기체 기록으로 알려진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는 1901년 제주항쟁을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1901년 1월 1일부터 7월 10일 제주를 떠나 육지에 닿은 1901년 7월 16일까지 일기내용이 날짜순으로 실렸다.

'제주목사 이재호 보고'는 항쟁 발발 직후 1901년 5월 10일 제주에 새로 부임한 이 목사가 사태를 수습, 그 결과를 중앙에 보고한 공문서다.
보고된 시점은 사태가 진정된 6월 2일로서, 당시 제주목사직을 겸임하고 있던 김창수 제주군수로 부터 보고 받고 채구석 대정군수와 김의주 정의군수의 보고 내용을 종합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특히 항쟁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명단을 수록한 명부로서 제주목에서 평리원 안종덕 검사에서 보고한 발굴 문서 '삼군교폐사실성책(三郡敎弊査實成冊)'이 이번 과정에서 새롭게 발굴, 원문과 번역본이 실렸다.

이 고문서는 지금까지 1901년 제주항쟁과정에서 사망한 전체 인원 및 명단을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1901년 제주항쟁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함께 발굴된 제주목사가 평리원에 보낸 제주항쟁 사망자 명단을 수록한 명부인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1901년 7월)'에는 교인 309명과 평민 8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진실과 화해' 논문 자료집 동시 펴내

제주항쟁 기념사업회는 제주항쟁의 발생과 전개과정에서 부터 1901년 천주교회와 제주전통사회의 충돌 등 다수의 논문을 수록한 신축제주항쟁 기념논문집 '진실과 화해'도 펴냈다.

이 자료집은 2001년 12월에 가진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회'때 다뤘던 심포지움 논문들이다.

'근대 중국의 구교운동의 성격'(허원), '한극근대개혁기 벙부의 대프랑스 정책과 천주교'(김태웅), 19세기 제주도민의 생활상과 민란추이'(권인혁), '1901년 제주항쟁의 발생과 전개과정'(김양식), '한말 제주지역에서의 토착문화와 외래종교의 갈등'(박찬식) 등이 실렸다.

또 '이재수 난' 영화비평(이상찬), '기억의 현재성:제주민중과 이재수난'(조상윤), '1901년 천주교회와 제주전통사회의 충돌'(문창우) 등 천주교와 제주도민의 시각에서 본 비교적 객관적 글들이 포함됐다.

▲ '진실과 화해'학술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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