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방울씩 흩뿌리는 아침, 산행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는데 다행히도 영실에 도착하니 엷은 안개가 사알짝 발밑을 감싸며 실비가 사알짝 내려 운치가 스며드는 산행의 첫발자국을 가볍게 내디딜 수가 있었습니다.
소나무, 참나무숲 길이 열리는 이 산길을 나는 명상의 산책 코스로 잡고 싶은 길입니다. 슬슬 산책을 하면서 걷다 보면 물소리가 저만치서 들려오고 간간이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옵니다.
참나무 잎들이 물 위로 하나 둘씩 여행을 떠나는 계절입니다. 산길에 쌓인 돌탑 무더기들, 우리는 그렇게 많은 기원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 역시 그렇습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기에···.
나무들은 이제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가고 있는데 인간만이 훌훌 털어 버리지 못한 채 늘 도전장을 내밀며 살아갑니다. 헐벗은 나목의 숲에는 조릿대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간간이 들려오는 산새들의 노랫소리, 찰랑대며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호젓한 산길을 지나면 층층 돌계단, 층층 나무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영실기암, 병풍바위와 오백나한을 만나게 됩니다.
1500 고지를 넘어선 지점입니다. 이쯤에서 잠시 쉴 겸 제주시 방향으로 내려다보면 제주시내에서 서쪽까지 이어져 있는 아름다운 곡선들이 알몸으로 누워있는 오름 천국이 펼쳐집니다.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지는 오름의 정경을 뒤로하고 층층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호젓한 산길 바위 밑에 수줍은 얼굴로 연하늘빛 꽃잎이 함초롬하게 피어 있는 한라구절초 한 송이를 만났습니다. 높은 고지대에서 만나기란 힘든데 그것도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다니 정말로 운 좋은 날입니다. 단오 날에 세 마디까지 자라고 음력 9월9일이 되면 아홉 마디까지 자라 연하늘빛 꽃을 피우는 구절초,
모든 꽃들의 진자리마다
이듬해 계절을 약속하며
떠나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어이하여
떠나지 못해
바위 밑 길섶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가
수많은 발자국마다
외면해버린 채
홀로 가련하게 피어
푸르른 가을 하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안개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며 영실기암을 잠재우며 안개들도 우리 뒤를 따라 산행을 합니다. 층층 계단 올라가다가 보면 구상나무 숲을 만나게 됩니다. 1600고지를 넘어선 지점입니다. 나는 이 숲길을 좋아합니다. 자갈들이 깔려 있는 구상나무 산길 힘든 오르막길은 다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여유를 가지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오릅니다. 슬슬 구상나무향기를 맡아가며 달그락 자갈들이 뒤척이는 소리에 호흡을 맞추며 내딛는 발자국마다 맑고 경쾌합니다. 구상나무 산길을 지나면 그야말로 행복의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 길을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환호성을 치며 달리고 싶은 길입니다.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의 길이기 때문에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라 말합니다.
침목으로 기다랗게 이어 놓은 길 오른쪽으로 ‘선작지왓’이라 불리는 고원평야가 있습니다. 오늘은 안개 속 치맛자락에 숨어 겨우 50미터 정도의 앞만 보일락말락 합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오름은 누운오름입니다. 누운오름을 돌면서 90도 각도로 깎여 지는 곳에 노루샘이 있습니다. 노루샘은 물이 마르지 않은 편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물이 말라 있습니다.
윗세오름 대피소가 안개 자락에 숨에 보일 듯 말듯 합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컵라면···, 등산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먹고 갑니다.
윗세오름에서 먹는 컵라면 김치 없이 먹어도 꿀맛입니다. 따뜻한 국물까지 다 먹고 나서 디저트로 커피, 귤까지 먹고 나서 슬슬 하산 준비를 했습니다.
아~ 천국으로 가는 길, 언제나 이 길은 너무나 평화롭고 달리고 싶은 길, 뒤따라오던 안개도 우리와 하나 되어 함께 하산을 합니다.
안개 속···, 나는 안개 속을 걸어보는 것도 아주 좋아하는 편입니다. 어느새 머리는 안개꽃으로 하얗게 피어오르고 눈썹까지 안개꽃이 피었습니다.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은 호젓합니다. 숲마다 돌마다 호젓합니다. 나는 이처럼 자욱한 안개 속을 걸어갈 때면 늘 헤르만 헷세의 시가 생각납니다.
---안개 속에서 ---헤르만 헷세---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인생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는 안개가 내리어
보이는 사람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 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는 없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모두가 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