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중앙로 뒷골목을 걷다 보면 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학교 어느 곳에도 '학교'란 한글 명패나 간판을 찾을 순 없다. 눈여겨 살펴보지 않으면 '그저 작고 오래된 건물이겠거니'하며 지나치기 일쑤다.

많은 이들이 이 정도 설명만으로도 "오라! 거기"하며 눈치를 챘겠지만 60년대 이후 한 자리를 지켜온 이 건물의 정체(?)를 자세히 아는 이는 드물지 않을까?

이곳은 바로 제주지역 화교(華僑)들의 정신적 구심체이자 교육의 총본산, 제주화교소학(이하 소학교)이다.

우선 학교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 외벽에 濟州華僑小學(제주화교소학)이란 한자 교명 밑으로 관자의 목민편에 나오는 '禮義廉恥(예의염치)'라는 전세계 화교 학교의 일치된 교훈이 눈에 띈다. 여기서 예의염치란 나라를 존재케 하는 기본 덕목. 고국을 그리는 화교들의 진정을 느끼게 한다.

아담한(?) 규모의 2층 건물인 학사는 현재 아랫층은 유치부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 한편 윗층에는 소학부(초등생)가 터를 잡고 있다.

▲  반백년 학교역사 지키기

제주대학교 전신인 제주초급대학이 지난 1952년 8월 개교했으니 역사로만 치자면 소학교 역시 이에 못지 않다.

제주에 소학교가 들어선 해는 지난 1953년 9월로 6.25 동란 정전협정일인 같은해 7월27일로부터 불과 한달여가 지난 뒤. 제주시내 구 나사로병원 인근 YMCA 건물 방한 칸을 빌려쓰면서 제주화교들은 자녀교육의 열성과 꿈을 일궈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교사 1명에 학생 10명으로 출발한 소학교는 그 때나 지금이나 대만 소학교 정규 교과과정을 따르고 있다.

지난 1963년 거금을 들여 완성된 현 학사는 건축 당시 지역주민들이 일부러 찾아와 구경할만큼 관심거리였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도 소학교 한편에는 신축 당시 발기인 9명의 이름이 새겨진 색바랜 문서가 액자틀안에 소중히 간직되고 있어 소학교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하고 있다.

이렇듯 제주 화교들과 지역주민의 관심속에 문을 연 소학교는 50년이 흐른 오늘까지 자신들의 말과 전통이라는 큰 줄기를 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학교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띈다.

대다수 화교학교가 비슷한 실정이지만 우선 학생수의 자연 감소(현재 제주화교협회 회원은 290여명)로 일반 학교와 같은 학년별 수업이 어려운 상태. 그러나 단 한명의 학생 뿐일지라도 수업은 지속된다는 소학교 전통이 이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이와 함께 일반 학교와 달리 정부의 재정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다. 게다가 시내 중심권에 자리잡은 학교 위치로 인한 교통 등의 어려움도 빼놓을 수 없다.

자유도시 추진으로 제주지역 외국인학교 설립 논의가 활발한 상태지만 어찌보면 반세기를 지켜온 원조 외국인학교인 소학교는 화교 사회외에는 관심밖으로 밀려난 모습이다.

이 학교 조병천 교사는 "차량 통행에 비해 통학로가 협소하다 보니 어린이들의 안전 문제가 우선 걱정스러운 상태"라며 "학교 주변 차량진입방지봉(볼라드)도 이리저리 직접 뛰어다니고서야 설치됐다"며 행정관청의 무관심을 지적했다.

이어 조 교사는 "학교 바로 옆에 신축중인 고층 건물 건설현장으로 지금도 계속 공사차량이 드나들고 있는 상태"라며 "어린이들이 다니는 학교란 면에서 뭐가 다른지 관에서는 학교 부지가 상업구역내에 있어 어쩔 수 없다고만 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  "라오스 하오" 제주속 이국

그러나 소학교 유치부의 상황은 그야말로 활기찬 모습이다.

2년제로 운영되고 있는 유치부 역시 학생수 자연 감소 등의 영향으로 화교 학생은 적지만 너나없이 밝은 모습들이 무척이나 정겹다.

"리정, 라오스 하오(차렷, 선생님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로 수업을 시작하는 모습이나 "시에 시에 라오스, 라오스 신쿠러(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라며 끝마치는 모습이 말만 다를 뿐 일반 유치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벽을 장식하고 있는 중국어 교본과 교실 정면 상단에 자리한 손문선생('중국 혁명의 국부'로 불린다)의 사진을 보고서야 이 곳이 소학교 유치원임을 알게 한다.

또한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유치부 소반(1년차) 원생들이 유창한 중국어로 노래를 부르니 한국 어린이와 화교 어린이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 쉬는 시간이면 원생들 사이에 한국말이 들려오긴 하지만 수업은 전적으로 중국어만으로 이뤄진다.

수업 중간중간 중국어 교재를 읽거나 오리기 공작 등을 하면서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한마디 한마디 따라하는 모습 역시 일면 이국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유치부는 이처럼 국적에 따른 입학 자격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아 '중국 알기' 열풍을 타고 제주지역 학부모들의 입학문의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이 곳 수업료는 타지역 소학교 유치부나 일반 유치원에 비해서도 저렴한 편. 또다른 사교육비 지출없이 중국문화와 중국어까지 배울 수 있다는 입소문이 번지면서 제주속 '작은 중국'이 커나가고 있다.

이렇듯 소학교가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었던 데는 화교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뒷받침 됐을 터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문제가 생겼다. 바로 소학교를 다닐 학생수의 자연 감소다.

이에 대해 제주화교협회 송복림 회장은 "저출산률의 영향 등으로 취학 연령대 도내 화교 어린이들이 적은 상태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제주시 이외 지역에 살고 있는 화교들은 소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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