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벌써 손이 시린 계절이다. 수은주가 뚝 떨어졌다. 날 선 바람 춤사위에 체감온도는 더 내려갈 듯. 믿지 못할 것은 여자의 마음? 올 가을은 여자의 마음보다 더 믿기 어려운 것 같다. 가을이 너무 짧다.

아침 7시. 표고 1169m, 제주시 해안동 어승생악으로 간다. 왕복 1시간 30분 가량의 어둑어둑한 길.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려 대지를 덮어주고 본질에 서 있다. 생명들을 본연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휴식을 취하려는 듯.

그러나 어승생악에 오르면 마음이 좀 달라진다. 탁 트인다. 어승생악은 1100도로 어리목 등산로의 한라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뒷산으로 우람한 산체를 자랑한다. 우뚝 서 있다. 도내 기생화산 가운데 안덕면에 있는 군산 다음으로 산체가 크다.

오름나그네 김종철 선생은 어승생악을 가리켜 “한라산 주봉이 오름왕국의 군주라 한다면 오름들의 맹주라 할 만하다"고 표현했을 정도. 어승생은 당당하게 우리 앞에 다가선다.

어승생악은 주변에 깊은 계곡이 발달했다. 남쪽으로는 외도천의 중류인 Y계곡이라 불리는 ‘어리목골'이 있고, 동쪽으로는 ‘아흔아홉골’이라 불리는 골머리계곡이 있다.

어승생이란 이름은 어승마(御乘馬)에서 유래됐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1702)에 ‘어승생(御乘生)·어승악(御乘岳)’으로,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1652)에 “어승생오름은 제주 남쪽 25리의 거리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100보나 된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이 오름 아래에서 임금이 타는 말이 났다’고 하므로 그렇게 불린다(御乘生岳:在州男二十五里, 其有池周百步, 諺傳比岳之下出, 御乘馬故名)”는 기록이 나온다.

정조(正祖) 21년(1797) 산 밑에서 용마(龍馬)가 태어나 조정에 바치자 어승마(御乘馬)로서 노정(盧正)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가자(加資)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곳에서 용마가 태어나 조명검 목사(牧使)가 임금에게 바치자 노정(蘆政)이라는 벼슬을 하사했다는 것. 노정은 김만덕 할머니와 고승인 혜일대사 등과 더불어 마노정·기만덕·승혜일이라 하여 제주 삼절로 그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풍수설에 의하면 어승생은 궁마어천형·천마유주형(宮馬御天形·天馬遊駐形)이라 하여 하늘나라의 상제(上帝)가 말을 타고 하늘을 달리는 형국이라고 전해진다. 그만큼 좋은 말이 이곳에서 많이 생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어승생악은 그러나 명마의 생산지라는 이미지 보다는 제주의 맑은 물을 이야기할 때 더 많이 이용된다. 어승생수원지의 원래 이름이 한밝저수지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 게다.

옛날 도내에서 식수문제의 해결은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만큼이나 절실한 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승생 수원 개발은 제주의 먹는 물 해결의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다.

1967년 1월 연두순시차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도의 근본적인 물 문제 해결을 위해 고지대의 수자원을 개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어승생과 아흔아홉골, 성판악 수원에 대한 개발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특이한 것은 어승생개발 사업과정에 1967년 국토건설단이란 이름으로 폭력배 500명이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4개월 동안 공사에 참여한 것. 일종의 노력봉사인 셈이다.

어승생 수원개발은 1970년 8월 공사완료 후 두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쳐 1971년 12월 저수용량 10만6000t의 저수지가 건설됨으로써 제주도 물 혁명의 대역사는 마무리하게 된다.

어승생악은 원추형 화구호를 갖고 있다. 화구의 둘레는 250m, 깊이는 20m가량 된다.

산정호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송이라 불리는 화산재인 스코리아 층을 지표수가 통과하지 못해 분화구에 고이는 현상이다. 분화구 벽의 송이층이 화구 내로 무너져 내리고 점토질의 화산재층이 쌓이면서 물이 빠지는 것을 막는 일종의 차수벽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일부의 경우는 산중턱에서 샘이 솟아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어승생악 화구호는 그러나 큰 비가 와야 물이 고인다. 과거에는 꽤 많은 물이 고였으나, 최근에는 내륙화가 진행돼 만수(滿水)가 된 화구호를 보기 어렵다.

화구호 주변은 자연림의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꽝꽝나무·청미래덩굴·주목 등이 눈에 띈다. 어리목광장 잔디밭 앞의 습원(濕源)을 낀 개울지대는 수태(水苔)의 자생지로서, 제주도 특산인 솔비나무 등의 독립된 임상(林相)을 볼 수 있고, 고유의 수생식물이 있다. 흰철쭉꽃도 발견된다.

어승생악은 또 일제 침탈의 현장이다. 어승생 오름은 제주시, 애월, 한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어승생악 정상에는 두개의 철근 콘크리트 토치카와 감시망루가 등산객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1945년 당시 제주섬 사람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토치카. 굶주림과 치욕 속에 남의 나라 전쟁을 위해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토치카 지하 깊숙이 배어있는 듯했다.

1945년 4월 제주도 방비강화를 위해 신설 편성된 제58군 사령부(사령관 나가쓰 중장)는 전략상 해안선 방비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한라산을 방어진지로 지구전을 펴겠다는 구상을 하게된다.

제58군은 이에따라 육상 전투할 때 지휘본부를 두기 위한 대단위 지하요새를 어승생 오름에 만들었던 것. 어승생 토치카는 어떠한 화력에도 견딜수 있도록 30cm가 넘는 두께의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광복 후 미군이 이를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 감시망루로 오르는 철근 사다리만 끊는데 그쳤다고 전해진다.

일제의 탐욕이 몸서리치도록 느껴지는 역사의 현장을 무작정 방치만 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하는 의구심이 정상을 내려오는 동안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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