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문화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변모로 대두된 노동문화운동을 비롯해 현장문화 운동에 대해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아울러 도내 청년문화운동 전반의 정리라는 측면에서 이 기획물이 지닌 제한적 성격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듯 싶다.

문화의 범주에는 예술말고도 언론·출판·교육·종교 같은 분야들이 당연히 포함돼야 한다. 예술운동과 마찬가지로 언론운동·출판운동·교육운동·종교운동 등도 문화운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생활문화, 이른바 “논의와 관련해 생존을 위해 싸우는 삶의 양식"을 문화로 규정하는 입장에 공감한다면, 예술운동으로 문화운동을 설명하는 방식은 객관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지 않다.

예술운동은 문화운동의 한 영역으로서 부분집합 일 뿐이다.

그럼에도 문화운동이라 함은 주로 문학이나 예술계에 국한해 설명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이 기획물이 지닌 맹점(?)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한다.

늦었지만 이에 대한 입장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할 듯 싶다.

이는 문학이나 예술 이외의 다른 부분과 비교했을 경우, 그 실천경험과 자기역량에서 비롯되는 운동의 위상 차 때문에 문화운동을 주로 주창했던 문학·예술패들이 언론·출판·종교·교육 부문들을 포괄할 수 없었던 배경에서 비롯된다.

특히 ‘제주청년문화운동’을 연재하면서 첫 회로 ‘틀깨기의 서막, 수눌음’을 알린 것도, 다시 말해 연행예술부분에 상대적 비중을 둔 것도 문화운동 제기와 활동양상에 비춰 이 방면의 선구적인 작업을 수행한데 따른 것이다.

1980년 8월 창단을 한 탐라민속문화연구회 극단 ‘수눌음’은 1983년 외압에 의해 해체의 곡절을 겪을 때까지 창립공연인 ‘땅풀이’를 비롯해 ‘항파두리 놀이’ ‘여우와 포도’ ‘돌풀이’ ‘좀녀풀이’ ‘태손땅’ 등의 공연을 통해 제주인의 끈질긴 삶을 토해왔다.

이는 이후 극단 ‘한올래’ ‘눌’로 이어졌고 1987년 놀이패 ‘한라산’에 이르러서는 더욱 구체화된 양상을 띠게 된다.

극단 ‘수눌음’은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반적인 문화운동의 흐름 면면을 두루 수용해내는가 하면 ‘지역적인 것에 대한 재인식’과 ‘제주지역 삶의 공동문제’를 꾸준히 표출함으로써 제주지역 문화운동 전개 과정에서 밑거름이 됐다.

1987년 8월 제주문화운동협의회 결성과 함께 참여의 확대차원에서 거론됐던 문화교실 개설·운영의 경우에도 문화운동 활성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제주지역 청년문화운동의 또 하나의 줄기로 자리잡게 된 노동문화운동·현장문화운동에 대해서도 정리해야 할 게 있다.

이는 1991년 3월 제주문화예술운동연합 건설준비위원회 결성과 활동양상을 통해 접근해 본다면 보다 면밀해 질 수 있다.

‘문화’라는 포괄적인 개념자체가 말해주듯 당시 제주문화운동협의회가 지닌 역량 한계에 공감한 몇몇 문예단체들은 활동의 폭을 세분화, 특히 노동문예운동에 주안을 둬 제주문화예술운동연합 건준위 결성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제주문화예술운동연합 건준위에는 미술분과 ‘보롬코지’를 비롯해 노래분과 ‘숨비소리’, 풍물·춤분과 ‘새날’, 영화사진분과 ‘움직거리’ 등의 문예패가 참여해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조직적인 활동양상과 역량 등에 대해 이 기획물이 다소 느슨하게 다뤄진 감이 없지 않다.

다만 ‘문화의 민주화’라는 대명제를 위해 궁극적으로 계급별·지역별 문화운동이 총체적으로 확산·발전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생각할 때, 노동문화 운동이나 현장 문화운동이야말로 문화운동이 가장 치중해 성과를 얻어내야 할 부분임을 거듭 확인하는 것으로 일단락을 맺기로 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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