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한권의 장편소설을 손에서 놓지 않는 채 네시간 반에 걸쳐 완독했다.
 
김녕희 장편소설 <시간의 비밀>이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전의 일제 말기부터 1987년 9월까지 약 40여년 동안 한 여인의 삶을 아니, 흘러가고 흘러오는 <시간을 공개>한 소설이었다.
 
김녕희 작가는 작가의 말 "시간의 여울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부 <센닌바리>를 쓴 것은 10년이 지났고, 일본의 식민지시대의 마지막 달의 배경이었다. 폐결핵이 위중하여 일본유학 도중에 귀국한 12세 주인공의 아버지가 강제징용에 끌려가고 마는 내용은 거의 반 자전소설이기도 하다.
 
일본의 천황이 항복을 하여 우리 조선백성이 8.15해방을 맞는 지방 소도시의 민초들의 애환을 그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2부 <인민군과 중공군>은 6.25전쟁에,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를 어리고 순수한 여중 1년생 소녀가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아픈 이야기이다. 우리 전쟁역사의 엄혹한 상처를 부각시키고 싶었다.
 
3부 <구름의 얼굴>과 4부 <솔베지의 노래>는 두 소녀의 생의 길을 추적해 간 인생유전을 담았다. 1945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 45년간의 시대적 흐름을 따라 간 두 여자의 일대기인 것이다."
 
이상이 작가의 말 "시간의 여울목"에서 발췌한 내용인데 민초들의 애환은 부조리와 아이러니가 가미됨으로서 더욱 안타깝게 전개된다.
 
1부의 <센닌바리>는 일본어로 <せんにんばり:센닌바리.千人針>인데 제2차세계대전까지 일본에서 빈번히 행해진 하나의 부적이고 민간신앙이다.
 
약 1미터의 무명천에다 많은 여성<천명>이 한 바늘씩 바느질을 하여 연결해 나가는데 무운장구<武運長久> 등의 글을 새겨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이 허리에 차거나 머리에 동여매어 전장에서의 행운을 기원한다.
 
지금도 일본 자위대가 외국에 파병될 때에 가끔 갖고 있는 대원들도 있다고 한다.
 
조선인으로서 전쟁에 강제 징집되는 주인공 임신애의 아버지도 센닌바리의 부적을 안고 출정하는데, 그의 형제들의 이념은 하나로 똘똘 뭉쳐진 것이 아니다.
 
만석꾼의 집안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약학대학을 졸업한 장남은 고향에 내려와 친일의 길로, 차남은 광복군으로 항일 운동을 위해 중국울 오가며, 삼남인 임신애 아버지 임순일은 일본 유학 갔다가 폐결핵으로 귀국하지만 철저한 반일파였다.
 
상대적으로 이들과 대치하는 일본인 이시가와 형제들의 이념도 그렇다.
 
순애의 소꿉친구이고 첫 사랑인 가즈오의 아버지는 신애가 다니는 소학교 교장선생이고 어머니는 다녔던 유치원 원장인데 온후하다. 작은 아버지는 의사이고. 막내 삼촌인 이시가와는 징병 담당자 순사로 피눈물도 없는 자이다.
 
식민지와 피식민지 사이지만 일제의 패전으로 귀국하는 가즈오는 만년필을, 그전에 징집으로 출정한구니모도 담임선생은 세이코 시계를 신애에게 주면서 헤어진다.
 
선명한 흑백 논리 속의 삶만이 아니고 거미줄처럼 얽혀진 인간 관계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는 2부 <인민군과 중공군>에서도 되풀이 된다.
 
신애 동생 은애가 미군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중공군 개입으로 피난할 때에는 유엔군의 오폭으로 신애 어머니가 등에 업은 아기와 행방불명이 된다.
 
3부 <구름의 얼굴>에서는 신애의 소학교 동창생인 금희가 신애를 좋아하는 신정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를 신애에게 한다.
 
"신정수가 널 좋아하는 걸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가 널 좋아하는 거지, 네가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잖아... ...?"
 
"난 부모 없는 고졸 출신 미용사이고, 그의 집은 부자이고 양반 가문의 보수적인 부모님이 버티고 계시다는 것도 알아. 그러니까 네가 도와줘야 해. 신정수와의 결혼은 내 인생의 희망이고 목표야!"
 
4부 <솔베지의 노래>에서는 이 부조리가 더욱 극대화 한다. 신애와 이혼한 남편이 동생 은애와 같이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혼한 남편은 엄연한 타인일 것이므로 처제 벌이었던 은애와 결혼하는 것은 조금도 인격과 법규에 어긋나지는 않을지 몰랐다.
 
그런 이론이라면 역시 은애에게도 적용될 것이었다. 하지만 신애는 이물질이 이 사이에 낀 것 같이 내내 거북한 느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신애를 좋아하는 신정수에 대한 금희의 생각이나 이혼한 남편이 동생과 산다는 것은 이론상 대나무나 무우 자르  자르 듯 분명하고 정확하다.
 
그러나 신애의 독백처럼 잇몸에 낀 찌꺼기와 같이 그것은 윤리와 도의에 대한 배반 행위이다. 그러한 부조리가 위화감 없이 다른 맥락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종회 경희대 교수는 작품해설에서, 김녕희의 <시간의 비밀>은 표제 그대로 시간과 세월의 여울목을 건너며 살아간 소녀요 여인들의 이야기다.
 
풍운의 시절을 견딘 여인의 생에는, 굳이 모파상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여자의 일생> 같은 소설의 시도를 탐내게 하는 소재라면서 한국어판 "여자의 일생"이고 "노년과 원숙성의 문학"이라고 평했다.
 
김녕희 작가는 1936년 경기도 이천 출생. 속명여대 국어국문과 졸업.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단편집 "고독한 축제" "혼자하는 내기" "오전시대" "결박당한 남자"
 
장편소설집 "행복의 빈 상자" "에덴의 강" "그해 겨울의 연가" "우리가 날개를 가졌을 때 전3권>"
"샤론의 수선화" "숨은 그림자" "창 밖의 사과나무" 외 8편이 있다.
 
한국소설문학상. 조연현문학상. 만우 박영준문학상. PEN문학상. 숙명문학상을 수상했다.
헌재 기독교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고문. 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이다.
 
<시간의 비밀>은 <문예바다>에서 금년 8월에 출판되었다.  <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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