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고현 타카라쓰카시<兵庫県 宝塚市> 의회에서 2008년 3월 25일 일본에서 처음으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의 성실한 해결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체택했다.<현재 41지방의회가 체택.>
 
이 역사의 도시 타카라쓰카시 "타카라쓰카시립 교육센터"에서 지난 1월 18일 "타카라쓰카시 인권. 동화교육위원회" 주최로 제3회 연구대회 <인권교류 배움의 모임>이 열렸다.
 
약 3백여명의 참가자들이 <재일 사람들의 바람과 삶> <아이 키움과 보육을 생각한다> <부락차별에 대해서 생각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과 같이> 등 7개분과위원회에서 보고자의 발표 후, 진지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필자는 <"재일"在日사람들의 바람과 삶>의 분과위원회에 참가했다. 보고자는 재일동포 여성 김호련<金湖蓮> 씨와 김가나<金佳奈> 씨였다.
 
1. 일본사회 속에 산다는 것. 2. "재일"의 사람들과 같이 산다. 3. 가정. 학교. 지역. 행정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제 속에 두 사람의 보고자는 "통명<일본명>에서 본명으로 살아갈려는 생각." "본명으로 살면서." "사회 속에서 느낀 점들과 바람"들이라는 내용을 발표했다.
 
첫 보고자인 김가나 씨는 초등학교 때 어머니의 권유로 통명 가네모토<金本>였는데 본명을 사용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성<姓>을 바꾼다는 사실은 엄청난 일이라기 보다는 사건이다.
 
물론 집안에서는 재일한국인으로서 선조대대로 물려받은 "김"이라는 본명이 있다는 것은 자라나면서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 성을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도 어리지만 역시 알고 있다. 
 
어린 나이에 본인도 이 당혹스러움을 제대로 마음 정리도 하지 못한 채 "본명 선언"을 했을 때 학교 친구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설령 그녀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학교 친구들이 알던 모르던 간에 구태여 공개해야 할 일은 아니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본명 선언"은 통명이 갖고 있는 모든 기득권까지의 포기였다.
 
그후 대학교까지의 학창생활 속에 통명을 사용하는 재일동포 학생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자기도 "재일"이라고 은근한 귀띔을 들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라고 했다.
 
대학 졸업 후, 취직 활동 때도 본명 사용이 가능한 직장을 택했는데 전화 응답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한국에서는 자기 소개할 때 성과 이름을 거의 모두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대개 성만을 말한다.
 
김가나 씨가 "김"이라고 자기 소개를 해도 몇 차례 되묻는다고 했다. 일본 성은 발음 하나만 갖은 성은 거의 없는데 짧은 발음 속에 말하는 생소한 성 "김"이라고 하니 상대방은 당황할 수 밖에 없다.
 
그녀가 본명을 사용하게 된 자세한 이야기는 발표 후 토론회 때 알았는데 감동적이었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이 가정방문을 갔을 때였다.
 
문패에 성이 두개가 있는 것을 보고 담임 선생이 그 이유를 물었다. "김:金"과 "가네모토:金本"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재일동포가 일본에 살아야 했고 성을 두개 갖어야 할 역사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담임 선생과 많은 의논 끝에 "본명 선언"을 했고 이 토론회에 그 선생도 참가했었다.
 
두번째 발표자 김호련 씨 차례가 왔다. "여러분 눈을 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방 하나에 외국인 한 사람과 일본인들이 있다고 상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처세하겠느냐의 물음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발표는 이색적이었다. 그리고 김호련 씨의 경우는 통명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들이 본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김호련 씨의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일본 담임 선생으로부터 아이의 성과 어머니의 성이 다른데 아이의 성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여성이 결혼하면 남편성을 따라서 성을 바꾸는 것이 호적법으로 정해져 있다.
 
이러한 관례가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드라도 의당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식 속에 가볍게 말했을런지 몰라도 교육자로서의 배려가 전혀 없는 처사였다.
 
우선 그런 요청을 하기 전에 왜 서로 다른 성을 사용하는가를 미리 조사하고 알아보거나 본인에게 자세히 들어야 했었다. 김호련 씨는 이 요청에 항의를 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고 한다.
 
"저는 직업상 가슴에 명찰을 부착하는데 "김"이라는 명찰을 본 사람들은 나는 한류 드라마를 좋아한다면서 배용준 등도 알고 있다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것은 저와 상관 없는 일이며 저에 대한 물음이 있었으면 합니다."
 
한류 바람으로 재일동포의 위상이 좀 높아졌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한류 붐 속에 재일동포는 그 화제 대상의 상대는 될 수 있지만 재일동포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직시성의 연계는 없다.
 
한류는 좋아하지만 재일동포는 싫다라는 일본인의 팽팽한 의식을 피부로 느끼는 동포들의 씁쓸한 감정은 순간적인 하소연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김호련 씨는 담담하게 피로했다.
 
김호련 씨는 발표 때 직업상 명찰 부착을 한다면서 직업은 말하지 않았지만 오사카부 토요나카<豊中>시립병원 간호사로 현재 근무하고 있는데 젊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전면적인 과실은 상대방에게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사고 조사 중에 김호련 씨에게 인적사항을 물었다.
 
김호련이라고 이름을 말했더니 통명을 말하라는 것이다. 본명 밖에 없고 통명은 없다고 그래도 그럴리가 없다면서 통명을 말하라는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사고 책임은 상대방에게 있었지만 혹시 김호련 자신에게도 있을까 봐서 일부러 사용하고 있는 통명을 경찰은 말하지 않고 있다고 의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한다.
 
이것은 발표가 끝나고 나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본명의 수난사들이었다.
 
"저는 본명이나 통명을 사용하는 것은 본인들 나름이지만 본명을 사용했을 때 첫 만남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그러한 만남이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차분하고 조용한 어조 속에서도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차별의 부조리에 대한 강한 항의 메시지였다.
 
"김호련 씨는 방 하나에 외국인이 한 사람만 있고 일본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고 했지만 저는 그 반대로 일본인이 한 사람만 있고 외국인들이 많은 방을 연상해 보라고 제의하고 싶습니다."
 
전체 질의 시간 때 류코쿠<龍谷>대학 전 교수인 토쓰카 에쓰로우<71> 씨의 질문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2000년까지 변호사 활동도 했으며 국제인권법 전문가로서 처음으로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를 <UN인권위원회>에 제기했고 "<한국병합> 100년 시민 넷트워크"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김호련 씨의 부친은 타카라쓰카에서 회사를 경영하며 "타카라쓰카시 외국인 시민문화교류협회" 고문인 김예곤<金禮坤> 씨이다. 재일동포만이 아니고 재일 외국인의 권익옹호와 문화를 위해서 제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 날 제기된 본명과 통명. 이것은 재일동포와 동포사회에 있어서 숙명적 명제이다.
 
차별이 엄연한 현실로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일본사회에서 양자택일의 어려움은 어느 길을 택해도 고난의 길이지만 압도적으로 통명 사용이 많다.
 
그러나 통명 사용에는 유전병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차별의 대상에서 탈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그것은 본질에 대한 자기 은폐이다.
 
이것은 카멜레온의 자기 보호와 다를 것 없다. 통명을 사용하여 가식<假飾>적인 일본인으로 처세할 때 재일이나 조국의 비판이 자기 주변에서 일어날 때를  생각해 보면 뚜렷해 진다.
 
한 마디 반론도 펴지 못하고 히죽이 웃으면서 굴절된 감정과 울분을 혼자서 맛봐야 하는 쓰라림은 때에 따라서는 일상다반사로 일어날 수도 있다.
 
비굴에 가까운 굴절과 컴플렉스의 감정의 앙금은 자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일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자식에서 다시 손자 세대, 또 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통명의 숙명론인데 이것을 유전병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일반적인 유전병은 치료를 위해서 경제적 부담은 물론 온갖 정성을 기울이며 이 불치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통명의 빚은 정신과 마음의 상처도 이러한 유전병과 다름없다. 아니, 오히려 더욱 중증인지 모른다.
왜 우리는 이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것을 고치는 처방책은 간단하다. 본명을 동포사회만이 아니고 일본사회에서도 사용하면 된다.
 
즉 통명을 없애 버리면 곧 치료 가능 한 것이다. 어디 가서 남한테 구차스럽게 나는 재일이라고 변명에 가까운 자기 소개를 안해도 된다.
 
통명으로 일어난 마음의 유전병은 이것을 없앰으로 인해서 완치되고 이것은 자기 해방을 의미한다.
 
연구대회가 열린 타카라쓰카시는 유명한 "타카라쓰카가극단"도 있어서 금년 창립 백주년을 맞았으며 인구는 작년 말 현재 약 22만 8천2백명이 있다.
 
외국인은 약 3천5백명이 있는데 51개국 중 한국, 조선적이 약 2천9십명, 브라질이 약 210명, 필리핀이 약 84명, 대만, 중국이 각각 약 30여명이 있다.<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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