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큰헤이드호

진도 해상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선장 이준석씨와 3등항해사, 조타수 등 선사 직원들이 승객을 뒤로 한 채 먼저 탈출한 가운데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이 관심을 끌고 있다.

1852년 영국 해군의 수송선 '버큰헤이드호'가 승조원과 그 가족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630명 그 중 130명이 부녀자였다.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약 65Km 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쳤다. 시간은 새벽 2시. 승객들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선실에는 소란이 일어났다.

사고 당시 승객은 630여명, 구명보트는 단 세척, 승객의 반도 안되는 180명밖에 구조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그 당시 함장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 병사들에게 갑판 위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함장의 지시에 따라 마치 아무런 위험도 없는 훈련시처럼 민첩하게 행동하여 부녀자들을 3척의 구명정으로 하선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구명정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사병들은 관함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구명정에 옮겨 타고 생명을 건진 부녀자들은 그 갑판 위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결국 세튼 대령을 포함한 436명의 군인들은 그대로 배와 함께 수장됐다.

누구나 명령대로 움직였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명령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모두가 잘 알면서도 마치 승선 명령이나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준수했다

이후 ‘버큰헤이드호 전통’은 각종 해상 사고에서 불문율로 자리잡았다.이후 ‘버큰헤이드호 전통’은 각종 해상 사고에서 불문율로 자리잡았다.

이를 접한 누리꾼들은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 베큰헤이드호 전통과 완전히 반대네”,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 버큰헤이드호 전통을 조금이라도 본받았다면 실종자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버큰헤이드호 사령관 너무 감동적이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 세월호 선장 이준석씨 <SBS방송캡쳐>

 

 

그런데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세월호 이준석 선장의 지난 10년 전 인터뷰기사다.  본지와의 2004년 인터뷰 기사에는 이렇게 얘기했다.

“고향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여객선으로 실어 나르며 내가 누리지 못하는 행복한 시간을 그들은 가족들과 누릴 수 있게 하는데 위안을 얻는다”라며 그는 오늘도 내일도 배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2004년 제주투데이 본지 인터뷰

 

 

당시 제주~인천노선 왕복여객선 청해진 고속훼리 1호 선장이었던 이 선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배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다”면서 “배에서 내릴 때면 섭섭한 마음에 다시 한번 배를 쳐다보게 된다”며 그의 배에 대한 사랑을 남달랐다.

그는 또 “처음 탄 배가 원목선이었는데 일본 오키나와 부근 해역에서 배가 뒤집혀 일본 자위대가 헬리콥터를 이용해 구출해 줬다”며 “그때 만일 구출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그랬던 그가 세월호 침몰 당시 승객들을 뒤로 한 채 홀로 탈출해 국민적 분노를 사고 있다.

10년 전 “오늘도 내일도 배와 함께하겠다”는 이준석씨의 말은 10년 뒤 공허한 외침으로 돌아왔다.

한편 광주지법 목포지원 류봉근 판사는 지난 18일 선장 이준석(68)씨와 3등항해사 박모(25·여)씨, 조타수 조모(55)씨 등 핵심 승선원 3명이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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