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수상의 헌법 신해석론

"6.25동란 때 우방 16개국이 참전하여 고귀한 피를 흘렸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필자만이 아니고 한국국민이면 지금도 구급법처럼 외우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6.25참전국 역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해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멀리 아프리키에서도 참전했는데 한국과 제일 가까운 나라이며 잘 살고 있는 일본이 왜 6.25 때 우방국으로서 참전을 안했는지 궁금했었다. 당시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으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렇게까지 못했었다.

그후 우방 16개국 참전은 전투병 참가국이고 의무지원국이 6개국, 물자지원국이 32개국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은 물자지원국이었는데 전투병 파병은 당시 한.일국교 정상화도 맺어지기 전이며 일제시대의 국민적 감정도 있어서 참전은 못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필자의 이 생각은 아전인수격에 가까운 해석이며 사실은 전혀 달랐었다.
6.25동란 때 미국은 일본에게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었지만 일본 요시다 내각은 거절했었다.

일본 헌법의 유명한 "제9조"에 의한 전투병 파병의 불가였다. 일본헌법의 "제9조"는 다음과 같이 명기돼 있다.

<9조> 1항.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希求>하며 국권의 발동으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혹은 무력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이것을 포기한다.

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그외 전력은, 이것을 보지<保持>하지 안한다. 나라의 교전권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상이 제9조 전문이다.

미국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견제하기 위해 연합국군정시대에 제9조를 명기했는데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전투 파병을 관철 시키지 못했는데 아이러니였다. 물론 한국의 찬부는 다음 문제였다.

일본헌법은 1946년 5월 연합국군정시대에 제90회 제국의회 심의를 거쳐 그해 11월 일본국헌법으로 공포되고 다음해 1947년 5월 시행되었다. 그 후 단 한번의 개정도 없이 오늘까지 유지해 왔다.

한국은 1947년 7월 17일 제헌국회에서 발표한 제헌헌법 이후 현재까지 제9차 헌법 개정 속에 전문 개정이 네 차례나 있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2010년 7월 현재까지 각국의 개헌 횟수를 보면 미국이 6회, 프랑스가 27회, 독일 57회, 이탈리아가 15회, 오스트레일리아가 3회, 카나다는 1867년 헌법이 16회, 1982년 헌법이 2회이다.

그러나 일본은 헌법 개정이 단 한번도 없었다. 세계 헌정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수 헌법이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헌법 개정론은 터부였다. 마치 종교의 성전<聖典>과 다름없었다.

1993년 12월 일본 자민당이 하야하고 호소카와 수상 때 나카니시 방위청장관이 각료 간담회에서 헌법개정의 발언이 있었다. 자민당은 즉각 각료의 헌법 준수 의무 위반에 해당된다면서 강한 비판을 전개해서 나카니시 장관은 그 책임을 지고 인책 사임했다.

순수한 헌법 호헌론에 입각한 자민당의 비판이 아니고 정쟁 차원의 끌어내리기 비판이었다. 어느 정당보다도 개헌론을 부르짓던 자민당에게 있어서는 아이러니였다.

그 후 모닥불처럼 피어오르던 개헌론이 아베 수상의 제2차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제히 타올랐다.
그러나 개헌의 길은 험하다. 국회의원인 중의원, 참의원이 각각 삼분의 이의 찬성 후, 국민투표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압도적 우위에 있지만 개헌을 충족 시키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다.
그래서 급부상한 것이 새로운 헌법 해석이다. 이것은 여당에서 합의를 보고 국회논전을 거쳐 각의 결정 후, 국회 표결에서 과반수면 통과된다.

아베 수상은 5월 15일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집단적 자위건행사:行使 한정 용인>을 위한 헌법 해석에 대해 정부와 여당에서 재검토할 의사를 밝혔다.

새로운 헌법 해석의 가장 핵심적 요소는 <집단적 자위권>이다.
집단적 자위권이라면 "자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가가 공격 당했을 경우, 자국이 직접 공격을 당하지 않더라도 실력으로 저지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유엔헌장>에서는 모든 국가에게 "고유의 권리"로서 인정하고 있으나 일본정부는 "권리는 보유하고 있지만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 예로서 미국의 함정이 공해상에서 제3국으로부터 공격의 위험에 처했을 때, 아니면 자국민이 유사시 밀접한 관계의 함선으로 귀국 과정에서 위험에 놓였을 때 일본 스스로가 현장에 출동해서 구출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서는 무력 행위도 불사한다는 의미이다.

미국 함정이 공해상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는 밀접한 관계인 동맹관계이고, 자국민 구출을 위해서는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지극히 당연한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대로이다. 그러나 일본 헌법에는 "제9조"가 있다. 국제분쟁 지역에서의 어떠한 무력 행사도 금하고 있다. 이 평화헌법이 있어서 전후 일본은 약 70년에 가깝게 외국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현재까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일본 국민에게는 국민정서로서 일본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대한 뼈아픈 과거사가 있다. 그것은 일본 국민에게 트라우마로서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다시 그 길을 걷지 않는다는 보장은 이디에도 없다.

개헌에 가까운 새로운 이 해석론을 정권을 잡은 집권당이 그때의 형편에 따라 헌법 해석을 바꿔버린다면 헌법의 존재는 유명무실하고 다시 새로운 집권당이 헌법 해석을 또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적 합의가 어렵고 자민당 내부에서도 신중론이 식을 줄 모르고 있으며 연정의 공명당에서는 더욱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에 반대하는 야당과 재야에서는 "해석개헌"이라는 새로운 신조어도 나오고 있다.

2006년 제1차 아베정권 때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퇴진했던 아베 수상에게 있어서 압도적인 지지 속에 제2차 집권을 한 이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이다.

연정의 공명당도 있지만 자민당의 주도 속에 정권을 운영하고 당내에 강력한 라이벌의 정적도 지금은 없는 상태이다.

외가 쪽의 할아버지 키시 노부스케 수상은 미.일안보동맹을 성사 시켰고, 작은 외할아버지 사토 에사쿠 수상은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반환 시켜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집단적 자위권>은 국민적 합의가 성숙하지 않는 상태 속에서 아베 수상의 개인적 신념에서 추진되고 있는 부분이 강하다.

아베 수상은 자민당의 장기 집권의 시야와 두 외할아버지 못지 않는 역사에 남을 수상으로서 야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일본을 되찾자: 니혼오토리모도소오: 日本を取り戻そう"라는 캣치플레이 속에 재집권한 아베 수상의 불변의 야망이 일본의 진로를 어디로 유도할런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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