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의 갑론을박(甲論乙駁)이 거칠다. 문창극 총리후보자의 교회강연-사실은 신앙 간증(干證)과 관련해서다.

KBS는 지난 11일 저녁 뉴스를 통해 3년전 있었던 문창극 후보의 교리강연 내용을 비판했다.
“교회 장로인 문창극 후보자(이하 문창극)가 교회 강연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남북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민족이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다”고 했다는 내용도 덧씌웠다.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대중의 심리를 자극할 수도 있는 비난 소지의 한 꼭지를 침소봉대해 문창극의 식민사관적 역사인식을 걸고 나섰다. 비판여론을 꼬드기기 위한 대중조작 풀무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창극에 대한 악의적 비판여론은 기승을 부렸다. 멀미 일으킬 정도다. 제철만난 메뚜기 떼처럼 사회가 시끄럽고 어지럽다.
‘친일파다, 광신도다, 매국노다, 역적이다, 반역이다’, 욕설은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살똥스럽다. 험악하고 무섭다.

도대체 교회강연 내용이 무엇이 기에, 어떤 신앙 간증이기에, 용광로 쇳물처럼 벌겋게 들끓고 있는 것일까. 여간 궁금하지가 않았다.

교회 강연내용을 구해 보았다. 풀 동영상이었다. 레코드 판 되돌리 듯 서너 번 반복해서 틀었다.
문창극 연설전문 녹취록도 구했다. 돋보기까지 동원해 시험공부 학생처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문창극의 친일적 역사인식은 찾을 수 없었다. 광신적 선동이나 천인공로한 반역적 발언은 없었다.
KBS의 선동처럼 역사부정의 식민사관이나 민족비하의 누워침뱉기 식 민족부정은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인이, 교인들을 상대로, 기독교적 언어로, 자신들이 믿어마지않은 신의 섭리와 신의 뜻을 이야기하고 해석한 것 뿐이었다.
말 그대로 신앙인이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하고 신앙교리의 바탕에서 신의 뜻을 헤아리는 신앙 간증(干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들은 바로는 기독교에서 신의 뜻은 시공을 초월하고 우주만물을 망라한다고 했다. 시련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신의 뜻이다. 이를 통해 구원의 축복을 받는 것이 신의섭리다.
고통과 시련과 죽음까지도 신의 축복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적 ‘신앙 언어’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노예 살이도 신의 뜻이고 이를 극복한 후의 ‘출 애급’은 신의 축복이라 했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처형도 부활을 예비한 신의 뜻이고 축복이라는 인식은 기독교 신앙을 관류하는 바탕이다. 기독교 신앙의 역설이고 반어적 상징비유다.
성경이야기는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신앙이야기인 것이다. 시비의 대상일 수가 없다.

장외에서 이러쿵저러쿵 기독교 신앙교리를 주절대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의미가 없다. 일반이 비판거리로 접근할 영역도 아니다.

여기서 문창극의 총리후보직 자진사퇴나, 대통령의 지명철회, 국회인준여부 따위는 본질이 아니다. 문창극의 총리로서의 자질과 능력 검증은 정치권에서 까불고 지지고 볶아도 될 일이다. 여기서는 관심 밖의 일이다.

문제의 본질은 썩은 고기까지도 물어뜯어 발기는 천박한 ‘하이에나 저널리즘’과 그 아류(亞流)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에 있다.
작은 티를 잡아 침소봉대(針小棒大)하고 증오와 저주의 돌팔매질이나 인격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은 언론의 야비하고 추악한 편견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일반의 적개심을 부추겨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잘근잘근 씹어대는 사악한 언론의 집단발작을 그대로 볼 수만 없어서다.

논란을 촉발시킨 문제의 방송보도는 문창극 강연의 진실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전체 문맥을 파악하지도 못했다. 전체 흐름보다는 시빗거리만 찾아낸 청맹(靑盲)과니 였다.

입으로 말은 잘 하면서도 눈으로 읽어 내용의 대강의 뜻도 파악하지 못했다. 국어공부를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닌가..
문맥의 전체흐름을 파악하고도 일부러 모른 척 했다면 진실을 추구해야할 기자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강연 내용을 편집함에 있어 '장님 코끼리 만지기'였다. 숲은 보지못하고 나무만 본 것이다. 사냥감 공격에만 혈안이 되다보니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20세기 최고의 독립언론인 ‘I F 스톤’(1907~1989)은 “저널리스트의 임무는 누구를 흠집내고 물어뜯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사실에 바탕을 두고 폭넓은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라 했다. 방송이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세상에 순도100%의 의인(義人)은 없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씀은 모두가 죄인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관련 방송의 ‘문창극 죽이기 짜깁기 편집 조작’ 행태는 예수의 말씀을 비틀어 “예수라는 자가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선동했다는 악의적 선동과 무엇이 다른가.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충무공 말씀을 "죽는 순간까지 부하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어거지 진실 왜곡과는 어떤차이가 있는가.

‘문창극 현상‘과 관련하여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문창극 끌어내리기‘에 여야 정치권이 한 통속으로 물어뜯는데 골몰하고 있다는데 있다.
여당 중진들의 행태는 더욱 가관이다. 제 잇속만을 위해서는 의리도 분별도 없다. 옹졸하고 비겁하다.

문창극에게는 해명이나 변명의 기회도 없다. 법으로 보장된 검증절차도 차단해 버렸다. 방어기재는 어디에서도 작동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문창극 죽이기에 혈안이다.

300명 가까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지금 같은 신상 털기 청문을 실시한다면 살아남을 의원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거의가 퇴출감이거나 추방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그런데도 성인군자인양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것이다.

악랄한 일부 언론과 파당세력이 정치적 야합으로 여론에 편승해 압력을 가하는 것은 사상의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짓밟아 버리는 패륜이요 야만적 폭거다.

여기에다 쪼가리 지식으로 나불대는 일부 방송 패널들의 ‘문창극 죽이기’의 부화뇌동(附和雷同)은 지식인 사회의 치부를 스스로 발가벗기는 또 하나의 수치다. ‘쓰레기 지식인’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인 것이다.

러시아사 연구 대가인 역사학자 이인호 박사(서울대 명예교수)는 “역사 인식 논란에 휩싸인 문창극 지명자에 대한 비난은 마녀사냥”이라고 했다.

문창극 강연 내용을 듣거나 발췌록을 읽어 보고도 그를 친일이나 반민족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사회분위기는 한탄스럽고 경위자체가 오싹하다. 그가 낙마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할 때”라고 분노 했다.

악마처럼 눈을 번득이며 정보의 쓰레기통이나 뒤집으며 사실을 왜곡하여 진실을 속이는 악마의 대변인이나 다름없는 언론과 침묵의 카르텔에 묶여 바른소리 제대로 못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며 일갈(一喝)이다.

‘독점언론은 여론의 다양성을 막고 대중의 알권리를 심각하게 저해하고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다“고 했다. 역시 ’I F 스톤‘의 말이다. 이미 오늘날의 ’쓰레기 언론‘을 내다 본 것일까.

‘너희 중 죄없는 자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2천년 전 예수시대를 달려와 오늘을 관통하며 가슴에 와 닿는 말씀, ’문창극 죽이기 언론‘에 던지는 교훈은 아닐는지. ’하이에나 저널리즘‘은 모닥불 같은 뜨거운 부끄러움에 고개 숙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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