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전 아니, 작년 12월까지만 하드라도 마스조에 요오이치<舛添要一.65>씨가 토쿄도지사로 일본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부활 할 줄은 일본 국민 한사람도 몰랐었다.

지난 7월 23일 박원순 서울시장 초청으로 토쿄도지사로서 약 18년만에 한국을 방문한 마스조에 씨는 25일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의 만남도 성사 시켜 한일 양국에 그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토쿄가 아무리 일본의 수도라고는 하지만 행정상 지방자치체의 하나에 볼과하다. 그 도지사가 박 대통령과의 만남을 한국은 물론 일본의 3개 중앙지까지 사설과 해설 기사까지 게재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껄끄러운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1년도 지나지 않는 2013년 9월 7일 아르헨티나의 브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제125차 IOC<국제올림픽위원회>총회에서 2020년 하기올림픽과 파라림픽 경기대회 개최는 일본 토쿄로 결정되었다.

일본 열도가 열광한 그때의 중심 인물은 마스조에 씨가 아니고 당시 토쿄도지사 이노세 나오키< 猪瀬直樹.67>씨였다.

토쿄도 부지사였던 그는 2012년 12월 토쿄도지사 선거에 입후보해서 약 433만표를 획득하여 일본 선거사상 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최다 득표 기록을 세웠다.

임기 4년인 도지사직에 토쿄올림픽 유치를 선거공약으로 내건 그의 압도적 승리는 2020년 올림픽 개최 때만이 아니고 그후에도 토쿄도정을 이끌어가리라는 장기집권을 누구나가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노세 도지사에게 일본 정가<政街>에서 갑작스런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한치 앞은 어둠:잇승사키와야미.一寸先は闇"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잘못 받은 정치자금이 말 그대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그를 몰아가고 있었다.

병원을 운영하는 의료법인 토쿠슈카이그룹 창설자 아들 토쿠다 타케시 씨가 자민당 중의원인데 그의 선거법 위반을 조사하고 있었다. 토쿠다 의원은 자신의 당선을 위해 위법인 선거 자금을 뿌렸다가 결국 의원직을 사임했다.

이 조사 과정에서 그 그룹에서 일화 5천만엔이 도지사 선거 직전에 현금으로 이노세 씨에게 전해진 사실이 탄로 났다. 이 책임을 지고 이노세 도지사는 취임 약 1년만인 2013년 12월 사임했다.

토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여 정치학자로서 대학 교수로 지내던 마스조에 씨는 1999년 토쿄도시사 선거에 출마해서 3위로 낙선했다.

그후, 2001년 자민당 공인으로 참의원 비례구로 입후보하여 약 158만표로 전체 1위 당선. 2007년 참의원 의원 비례구로 입후보해서 약 46만표로 자민당 1위 당선으로 재선.

자민당 내부에서만이 아니고 일본국민 중에서도 수상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 순위 제1위를 계속 유지하던 그는 제1차 아베, 후쿠다, 아소오 내각에서 후생노동대신을 역임했다.

사양 길을 걷던 자민당이 하야했을 때 정권 말기부터 자민당 비판을 거침없이 했던 그는 2010년 자민당을 이당하고 "신당개혁" 대표로 취임했지만 몇 안되는 국회의원을 거느린 신당개혁은 태생의 한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권을 잡은 민주당이 내부 분열로 지리멸멸하여 자민당이 되살아나고 다시 정권을 잡으니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자민당 의원만이 아니고 정부의 각료까지 역임하면서 자민당을 비판 하는 반당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면서 그의 이당과 함께 자민당은 제명 처분까지 내렸었으니 다시 자민당을 기웃거릴 수 없었다.

2013년 그는 당선 가망성이 없는 참의원 선거에 불출마를 표명하고 그해 7월에는 신당개혁 대표직도 사임했고 참의원 임기만료로 퇴직했다.

이것은 마스조에 요오이치의 정치생명이 끝남을 알리는 쓸쓸한 정치무대의 퇴장극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이노세 토쿄도지사의 도중 하차로 그에게 막은 다시 열렸다.

2020년 토쿄 올림픽 개최를 비롯하여 강하게 밀어붙이는 자민당 정책 수행을 위해서도 아베정권은 수도 토쿄도지사에는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내세워야 했다. 한국의 전략 공천과 다름없었다.

토쿄도지사에는 주요 후보자로서 무소속 전 수상 호소카와 모리히로<76>, 무소속 항공자위대 출신 다모가미 토시오<66> 씨등 10여명 이상이 출마했다.

자민당에서는 마스조에 씨를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표면화 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저항감 역시 또한 심했다.

2014년 1월 각종 신문의 여론 조사에서는 토쿄도지사로서 마스조에 요오이치 씨가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 선거에는 실타래처럼 서로 얼키고 설켜서 꼬인 부분이 많은 것도 특징이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참상으로 반 원자력발전소를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한 전 수상 호소카와 씨의 절대적 후원자는 코이즈미 쥰이치로 자민당 전 수상이었다.

이에 대해 자민당에서는 호소카와 씨를 응원하는 코이즈미 전 수상을 해당 행위라고 비난하자 젊은 자민당의 상징인 그의 차남 코이즈미 신지로오<33> 중의원은 공개적으로 반론을 폈다.

자민당이 제일 어려울 때 자신만을 위하여 자민당을 비판하고 탈당하여 제명까지 당한 마스조에 씨를 자민당이 추대할려는 행위야말로 어부성설이라고 맞서면서 부친을 감쌌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을 무차별 비판하는 초강경 보수인 항공자위대 출신 다모가미 씨를 토쿄도지사 2기를 역임하고 "일본 유신회"를 분당해서 "차세대의 당" 소속 중의원인 이시하라 신타로오 씨가 강력하게 후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시하라 의원의 장남 이시하라 노부데루<57> 중의원은 자민당 <토쿄도의회 토쿄도련회장>이고 환경대신을 맡고 있다. 또 4남 이시하라 히로타카<50> 씨 역시 자민당 중의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가 자신도 자민당 출신이고 대신까지 역임했던 이시하라 신타로오 씨는 막무가내로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마스조에 씨에 대한 비판 세력이 많았지만 자민당은 어떻든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추대해야 했다. 자민당은 연립정부를 계속 유지해온 공명당과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무소속으로 출마한다는 그를 지지하기로 했다.

마스조에 씨는 2014년 1월 14일 토쿄도청에서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입후보를 표명하고, 1월 21일 신당개혁을 이당했다.

2014년 2월 9일 선거 결과 약 211만표를 얻고 제19대 토쿄도지사에 당선되어 2월 12일 취임했다.

2013년 7월 28일, 2기 참의원 임기를 마치고 약 4개월 간 칩거했던 마스조에 씨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억세게 재수 좋은 강운 속에 일본 정치 제일선에 부활했다. 이것은 본인도 전혀 예상 못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스스로가 깨트린 대박이 아니고 복합적인 요소들이 절묘한 화학 반응 속에 융합된 대박이었다.

프랑스 여성과 처음 결혼해서 이혼 후 현재 자민당 참의원인 카타야마 사쓰키<55>와 결혼 후 두번째 이혼. 지금은 비서와 결혼해서 아이 둘이 있고, 또 일본인 여성 두 사람에게 혼외 아이 셋이 있다.

다른 정치가 같으면 이러한 프라이버시가 자칫하면 정치 생명에 치명타를 줄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문제시 되지 않는 것도 어쩌면 타고 난 운일런지 모른다.

아전인수격이고 흔들리기 쉬운 갈대 정치가들이 넘쳐흐르는 일본 정가에서 정치가이기 이전에 국제정치학자로서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역사인식들에 대해서는 평가할 수 있는 지한파이다.

5천만엔의 부적절한 정치자금으로 토쿄도지사직을 사임한 이노세 씨는 작가인데 그가 쓴 <마음의 왕국>이라는 책이 2008년 "언덕을 넘어서"<오카오코에떼:丘を越えて>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내용은 현재 한국 때리기의 선두를 달리는 월간지 <문예춘추>를 창간한 키쿠치 칸과 동화작가 마해송과의 사이에 펼쳐지는 상사와 부하 관계<당시 마해송은 문예춘추 사원이었음>, 또 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연적<戀敵>으로서의 갈등을 그렸는데 지금과는 달리 휴머니즘이 넘쳐흐른다.

2008년 8월 1일자<금> 제주투데이에 필자가 썼다. 그것을 여기에 첨부한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57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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