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의 침구 시술권이 침구사에게 있음이 세계적으로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한의사들 내부의 목소리도 거셌다. 침구사협회가 주도한 세계침구학술대회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며 침구사법 입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계산도 위기감을 부채질 했다.

#관인 침구학원의 침사 부활 운동

그때 침구인들은 관인 침구학원 동창회 이름으로 침구사법의 부활을 요구하는 침사 법안을 제안해 놓은 상태였고, 한의협은 이 법안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한의협은 한국의 침구의학이 세계 속에서 점하는 위치나 침구의학의 발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의료법이 개정되어 침사법이 부활되는 것만큼은 용납하지 못했다. 그들은 침사법이 부활되면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라고 여겼다.

침구술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침사법 제정을 가로막기 위해 한의협은 세계침구학술대회를 주최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 땅의 모든 한의사가 이기적이며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침구술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풍토는 한의사들 본인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와 이른바 식자층이 주도했고 많은 지식인들이 한민족 고유의 전통은 업신여기고 해외 문물만을 좇은 결과였다. 사실 해방이 되고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이 기틀을 잡아가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한의사도 매한가지였다.

원로 한의사들은 현대의학과 전통의학으로 대별되는 이원화 의료체제의 초석을 만들기 위해 갖은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다.

서양의학으로 대변되는 현대의학은 조선말 황실의 육성정책과 일본의 양의학 위주의 보건의료 정책에 힘입어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해방이 되어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우리나라의 보건의료 주도권은 미국 군의관들이 가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우리의 전통의학을 무시한 채 서양의학 중심으로 의료체계를 잡아나갔다.

#숨막히는 양의사와 한의사 갈등

대한민국 정부가 최초로 만든 의료 관계 법안 또한 서양의학 일색이었다. 1950년 정부는 한의사를 배제한 보건의료 행정법안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통과가 거의 확실하게 여겨지는 의료법안에 제동을 건 이는 조헌영 국회의원이었다.

전통의학 연구자이기도 했던 그는 전통의학의 우수성을 역설하며 전통의학 관계 조항을 포함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 결과 상정되었던 보건의료 행정법안은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폐기되었던 의료 관계법이 새롭게 선보인 곳은 부산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1·4후퇴로 부산으로 옮겨간 정부는 피난지에서 개최한 국회에서 국민의료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한의사 제도를 부인한 것이었다.

한의사들은 정부가 제시한 의료제도에 대해  거세게 항의 했다. 동시에 정부 요직과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여나갔고 마침내 한의사를 인정하는 ‘이원제 국민의료법안’을 국회에 상정시켰다.

국민의료법 중에 한의사 관련 조항이 포함되자 이번에는 양의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부산 주재 한의사들과 의사들은 자금을 마련하고 서울에서 내려간 의사와 한의사들은 정치적 로비를 맡아 뛰는 혈투가 벌여졌다.

치열한 싸움과 경쟁을 벌인 끝에, 서양의학이 들어온 이래 번번이 패하던 한의사들이 양의사를 누르는 이변 아닌 이변이 연출되었다. 거수 표결 결과 재서 116석 가운데 가61, 부18로 이원제 국민의료 법안이 통과되었고 1951년 9월 25일 법률 제21호로 공포되었다.

지난 일을 되짚어보니 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대한민국 의료체계에 있어서모든 이권을 차지하려 했던 의사 집단에 당할 만큼 당했던 한의사 집단이 수십년 째 침구인들에게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의사들의 구심점인 대한의사협회와 대한한의사협회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압력단체들로 성장했다. 두 단체는 그들이 보유한 전문성과 동원력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노력할 시기임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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