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년을 일하다가 직장에서 튕겨 나와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백수라고 부르지”로 시작되는 서유석의 노래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가 세삼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7월6일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너 늙어 봤냐, 60대 어르신 자작 뮤비’라는 제목으로 올라왔던 동영상이 최근 국회 설훈(새정치민주연합)의원의 ‘노인 폄하‘ 발언에 힘입어(?) 조회수 40만건에 육박하는 폭발적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영상은 어느 식당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60~70대로 보이는 어르신 4명이 앉아 ‘너 늙어 봤냐’를 기타 치며 부르는 영상이다.

한 여성의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랫말에는 “누가 내게 지팡이를 손에 쥐게 해서 늙은이 노릇을 하게 했는가”, “누가 말려도 컴퓨터 배워 인터넷도 하고 영어 중국어 아랍어도 배워 이 넓은 세상 구경 떠나 볼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늙음이라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는 노인들의 마음을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늙은이 수난시대‘에 세상을 향해 외치는 ’노인들의 아우성이‘나 다름없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는 후렴구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강렬한 희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노인들을 밀어내고 타박하는 세태에 대한 반항이고 경고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얼핏 듣기에 재미있는 노랫말 정도로 지나칠 것 같던 ‘너 늙어 봤냐’가 왜 이렇게 새롭고 강렬한 소리로 뜨고 있는가.

습관적 구설(口舌)을 달고 다니며 말의 악취를 풍기는 설훈의원의 저질 ‘안하무인 기고만장‘ 발언이 불을 붙인 것이다.

설의원은 최근 한국광관공사에 대한 국정 감사에서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로 임명된 ‘자니윤(78·본명:윤종승)’에게 “쉬어야지 왜 일을 하려고 하느냐. 정년제도가 왜 있나. 연세 많으면 판단력이 떨어져 쉬게 하는 것”이라고 면전에서 힐난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다.

설의원의 발언은 악담중의 악담이 아닐 수 없다. ‘늙으면 집에서 쉬다가 죽으라’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100세 시대’라고 한다. 의학의 발달과 경제수준과 건강관리 의식 등의 향상으로 평균수명이 77.9세(남)~84.5세(여)로 늘어났다. 기대수명도 100세를 넘고 있다.
그래서 70~80대 나이는 노익장(老益壯)을 과시 할 수 있는 한창 나이라는 말도 있다.

70~80대에도 큰일을 했던 인물은 많다. 90세에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현역도 많았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88세에 중국대륙 시찰 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혁 개방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미국의 레이건 전 대통령은 우리나이로 79세까지 대통령직을 완수 했다.
92세까지 미국의 상원의원을 지냈던 로버트 버드, 46년간 미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하다가 91세에 은퇴한 헬렌 토마스 기자도 영원한 현역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2차대전의 영웅인 영국의 처칠도 77세에 수상에 재취임 했었다.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은 77세부터 88세까지 수상 직을 수행했었다.

설훈의원이 존경해 마지않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74세에 대통령에 취임 79세까지 대통령직을 완수 했다. 대통령 재임 중 남북정상회담을 가졌고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설의원의 말대로라면 김대중 전 대통령도 판단력이 떨어져 쉴 나이에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남북정상회담을 했다는 타박이 아니던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설의원의 편협하고 옹졸한 인식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함이다. 자신들을 태어나게 하고 키워준 노인들에 대한 ‘설훈 식 밀어내기 세태‘에 대한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전국노래자랑 국민 사회, 송해 선생’도 1927년 생 88세 나이다.
‘꽃보다 할배’의 탤런트 이순재는 우리나이로 80세, 신구는 79세다. 현재도 활동 왕성한 현역들이다.

설의원의 기준대로라면 이들도 뒷방 늙은이로 손가락이나 빨며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도태 노인‘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설의원의 발언은 시쳇말로 ‘싸가지 없는 망발’이다. 인간성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막말인 것이다.
노인이건, 여성이건, 장애인이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비하는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을 수 없는 반인권적 패륜적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설의원 나이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이로 62세다. 65세를 통상적으로 노인이라고 한다면 설의원은 사실상 ‘예비노인‘이거나 ‘준 노인‘이나 다름없다. 노인을 손가락질 하거나 힐난할 나이나 처지는 아닌 것이다.
언제까지나 싱싱하고 사철 푸른 '에버그린(ever green)'일 수만은 없다.

물론 노인들은 활동이 둔하고 병약하여 시들어가는 계층임에는 틀림이 없다.
젊음의 힘과 패기나 열정은 이미 식어버린 세대다.
지나친 집착과 노욕(老欲)으로 인해 노추(老醜)해 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는 삶의 지혜나 경륜이 짜 올린 노련미는 젊은이의 그것과 비할 바 아니다. 심연처럼 깊고 그윽하다.
인생사의 질곡에서 쟁여온 깊은 통찰력과 예지력, 느림의 미학에서 빚어내는 여유로운 삶의 철학은 늙음의 연륜이 일구어낸 열매라 할 수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늙으면 도태된다. 인간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의 도태는 늙으면서 쌓아온 삶의 지혜와 경륜을 서쪽 하늘의 아름다운 황혼으로 물들일 수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후세의 귀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젊은이에게서 찾을 수 없는 진득하고 풍부한 사회발전의 소중한 자산이고 자양분이다.

그렇다면 단지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하고 구박당한다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인간세상의 공존 영역은 아니다.
늙으면 잡아먹히는 동물 세계의 도태질서일 뿐이다.
따라서 설의원의 ‘노인비하 발언‘은 인간세상의 존엄을 동물의 세계로 내쳐버리는 동물적 인식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설의원이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노인에 대한 존경심을 손톱만큼이라도 갖고 있다면 자니윤 본인에게는 물론 인간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노인들에게 진솔한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게 마땅한 일이며 사람으로서의 최소한 도리다.

그렇지 않고 버티기로 일관하다가는 동물의 왕국에서처럼 이빨이 세고 젊고 강한 힘에 의해 그 스스로가 도태되는 비참한 운명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는 노래가 큰 울림으로 다가서는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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