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전 제주시 영평동 첨단과학단지에 위치한 모뉴엘 제주 본사는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다.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근무하는 곳이지만 안내데스크는 텅 비어있었고, 본관 로비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회의실이나 휴게실도 비어 있는 상태다.

모뉴엘 제주사옥
비어있는 사옥

혹시라도 직원들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본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발길을 돌릴 때 청소·경비 업체 용역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뉴엘 제주본사 경비 소장인 A씨는 "법정관리 신청이 알려진 지난 20일 이후부터 정상적인 업무가 안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고 말했다.

A씨는 "직원들의 절반 정도는 원래 집으로 돌아갔다"며 "주거 문제 등이 정리되지 않은 일부 직원들만 기숙사를 이용하며 본사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비직원 B씨는 "다들 실망이 크고 한마디로 멘붕(멘탈붕괴)인 상태"라며 "건물이 매각이 되거나 정리가 돼야 우리도 철수를 할 텐데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뉴엘은 2012년에 제주 이전을 결정하고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 내 2만664㎡ 부지에 500억원을 투입, 올 해 초 신사옥을 완공했다. 제주본사에는 연구기술센터, 기업연수원 등이 있고, 100여명의 연구개발 인력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서울에 있는 집을 팔고 배우자의 직장까지 옮겨가며 제주도로 이사한 직원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모뉴엘은 연내 서울 본사를 제주로 완전히 이전하고 직원 120여명을 제주 신사옥으로 옮길 예정이었으나 이번 법정관리 사태로 이전 계획은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B씨는 "완공된지 얼마 안 된 건물인데 기숙사도 있고, 워낙 규모가 커서 매각도 쉽지는 않을 것"이라며 "아마 제주도에서는 마땅한 임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모뉴엘 사태로 인근 제주 이전기업들도 비상이 걸렸다.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 내 위치한 한 기업 관계자는 "직원들이 제주로 이전하려면 집이나 학교 등 포기하거나 결정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망설이는 경우가 많은데, 모뉴엘 사건이 터지면서 전보다 더 위축되고 꺼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편 모뉴엘은 홈시어터PC를 중심으로 로봇청소기, 제빵기 등을 판매하는 가전업체다. 2007년에 매출 200억원대에 불과했으나 6년만인 지난해 1조원대 매출을 돌파하며 급성장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로부터 극찬을 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했으나 지난 20일 갑작스럽게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현재 박홍석 모뉴엘 대표는 위장수출을 한 혐의(관세법 위반)로 구속된 상태다.

박홍석 모뉴엘 대표

왜,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모뉴엘의 총판을 맡아 7년간 홈시어터PC 제품 2000억원어치를 정상적으로 팔았을 뿐입니다.”

열흘 전 KT 관계자는 모뉴엘의 수출 조작 사건에 KT ENS의 연루 의혹을 이같이 해명했다. 모뉴엘의 법정관리 신청과 허위 수출 사건이 알려진 직후였다.

관세청의 조사 결과는 KT의 해명과 달랐다. 관세청은 KT ENS가 모뉴엘로부터 팔리지도 않을 제품을 받아 수출채권을 발행했을 뿐 아니라 해외 유통업체를 알선했다는 증거를 확보해 검찰에 관련자를 송치하기로 했다.

모뉴엘의 3조2000억원대 허위 수출 사건은 앞서 KT ENS 직원과 협력업체들이 짜고 벌인 ‘1조8000억원대 대출 사기’ 사건과 닮았다. 사기 대출에 매출채권을 활용한 구조가 똑같고, 대출 사기가 발생한 시점도 2007년 전후로 비슷하다. 모뉴엘은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KT ENS와 홈시어터PC 총판 계약을 맺었다. 모뉴엘은 성장 초창기였던 2008년 KT ENS와 미국 ASI 등 2곳에 매출(738억원)의 94%를 의존할 정도였다.

관세청은 모뉴엘의 급성장 과정에서 KT ENS가 사실상 모뉴엘의 ‘은행’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금융권은 총판업체 KT ENS가 발행해준 수출채권은 안심하다고 믿고 모뉴엘에 자금을 융통해줬다가 또 당한 셈이다.

KT ENS가 희대의 사기극 두 건에 잇따라 연루되면서 KT의 관리능력도 의심받고 있다. KT는 지난 3월 ‘꼬리 자르기’ 논란에도 KT ENS를 법정관리에 집어넣어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사건의 성격은 인감을 날조한 직원의 ‘개인비리’로 규정지었다. 비리가 저질러졌던 시기에 KT ENS 사장을 지낸 인사를 본사 요직에 발탁했다.

모뉴엘 사건은 KT ENS의 신규사업이었던 총판사업에서 발생했다. 조직적인 과실이다. 사기대출 사건을 계기로 당시 KT ENS 사업 내용을 들여다봤을 KT가 모뉴엘 사건에 대해 “정상적인 거래였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석연치 않다. 자체 조사가 부실했거나, 지나가면 그만이라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자회사 일이라고 뒷짐지고 있을 사안은 아닌 것 같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