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직장의 새해 시무식이라면 직장 상사의 덕담을 시작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상히게 된다.

또한 구성원들의 단합을 다지고 한 해를 힘차게 출발하기 위한 결의의 자리일 것이다.

하지만 제주의 모 사립대학교의 시무식은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시무식 시간이 임박해 숨 가쁘게  2층 계단을 뛰다시피 올라온 교수들과 교직원들은 행사장 입구에 들어서자 생소한 광경에 모두 멈칫했다,

유별나게 추웠던 이 날, 자신들이 헉헉거리며 하얀 입김을 내뿜은 탓인지 아니면 생전 처음 보는 광경 때문이었는지 하얗게 뿌예진 그들의 시야 속으로 누군가 팻말을 들고 맞은편 벽에 등을 붙이고 서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호기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광경에 눈을 치켜뜨고 시선의 초점을 다시 한 번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바로 이번 재임용에서 탈락된 이 대학 음악과 강모 교수였다.

그의 입에는 엑스표가 그려진 마스크가 씌어져 있었고 그의 손에는 “부당한 재임용거부 결정에 불복한다”는 큼직한 글귀가 쓰여 있는 팻말이 들려져 있었다.

실내 천정에서 돌아가는 히터의 열기가 추위로 얼어붙은 교수들의 발길을 행사장 안으로 재촉했지만 희한한 광경에 꽁꽁 얼어붙어버린 그들의 마음만큼은 강모 교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대놓고 그에게 아는 척 하지 못했다.

강모 교수에 대한 재임용거부는 이 대학이 개교한 이래 학교재단의 공식적인 재임용 심사로는 처음 있는 사건이다.

또 이 대학의 독특한 분위기에서 해직 교수가 겁 없이 피켓을 들고 총장과 재단 이사장을 상대로 시위를 하는 경우도 예전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다.

참여정부 시절 사립학교법 개정이 사학재단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된 후 이 사립대학의 교육현장에는 민주화의 봄은 다시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대학재단이 강모 교수의 재임용을 거부한 이유는 업적평가 점수가 기준에 미달됐다는 것이다.

강모 교수가 3년간 받은 평균 점수는 57.8점인데 이 대학의 재임용 기준 점수는 60점 이상이다.

최근 판례는 업적평가에 의한 교수의 재임용 결정을 불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강모 교수는 대학의 업적평가기준이 매우 불공정하고 불합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구실적으로 인정하는 연주회에 대한 기준이 다른 2년제 동일학과들에 비해 지나치게 높고 게다가 비현실적입니다. 더욱이 그것마저도 총장의 사전 결재를 받지 않으면 실적으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강모 교수는 또 업적평가 총점 100점에서 20점을 차지하는 종합평가가 총장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평가로 이뤄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종합평가에서 만점 20점 중 11점만 받았더라도 3년 평균기준인 60점을 넘게 돼 그의 재임용은 문제될 수 없었다.

그는 재임용에서 탈락된 가장 주요한 이유를 자신이 교수협의회 공동의장 5명 중 대표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총장 등 대학 최고운영자 측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워왔던 점을 들었다.

족벌체제인 이 대학의 총장과 재단 이사장은 부자지간으로서 현재 입시비리 및 교비횡령으로 검찰에 고발돼 수사를 받고 있는 상태다.

다른 공동의장들도 모두 최하 0점에서 최고 4점을 받았다는 사실은 종합평가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교수협의회는 종합평가점수에 대해 대학당국에 내용증명을 통해 정보공개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한 바 있다.
 
강모 교수는 평소 제주지역 사회에서 ‘서민들의 거리 음악가’로 자처하며 고전음악의 대중적 보급화를 위해 힘써 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대학당국이 떳떳하게 밝히지도 못하는 주관적인 평가점수를 근거로 30년 이상 경력의 교직을 하루아침에 그만두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을미년 양띠해의 시무식은 강 교수의 간절한 ‘묵언의 외침’에 귀를 막은 채 ‘양들의 침묵’ 속에 예정대로 야속하게 시작됐다.

행사장 입구의 이례적 퍼포먼스가 신경에 걸렸는지 식사에서 총장은 업적평가가 모든 교수들의 동의를 받았다는 대목에 이르러 특히 힘을 줘 강조했다.

그리고 대학 간 경쟁 심화와 현 정부의 대학구조조정 정책을 언급한 데 이어서 반값등록금 정책을 거론하며 재정곤란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제 대학 구성원들의 자발적 희생을 강조하는 차례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행사가 시작된 후 입구에 홀로 남겨졌던 강모 교수가 식장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들어 오더니 왼쪽 통로 앞쪽에 가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총장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우뚝 서는 것이었다.

그동안 총장이 얼굴도 들지 않고 미리 써온 글을 그냥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이 잠시 뿐의 여유로 끝나버렸다.

갑자기 작아진 총장의 목소리에 떨림이 실리고 빨라진 발음에 더듬는 듯 느낌이 전해졌다. 국제적 호텔대학과 승용마 개발 등 각 학과들의 비전을 대충 읽어가다 서둘러 시무식사를 마쳤다.

대학당국은 경찰까지 호출

총장은 식사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지난 한 해 동안 교수들과 교직원들의 노고를 잠깐 언급했지만 이 대학 역사의 신기원을 세웠던 강모 교수의 시위장면에 충격으로 퀭해진 그들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매년 관례적 행사인 새해 첫인사에서 서로 첫 악수를 나누며 밝은 미소를 지었던 사람들은 총장과 보직교수들 몇 명뿐이었다.
 
평생 교직을 언제나 긍지와 보람으로 삼았다는 강모 교수는 이번 재임용 거부로 올해 2월 말까지 정든 교정과 사랑하는 학생들을 떠나야 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문제에 교육자로서의 명예와 자존이 달려있다며 법적 소송과 사회적 여론 조성을 통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이 사립대학교는 작년 봄 교수협의회와 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된 이후 교수들이 해고되고 노조지부장을 비롯한 많은 직원들이 중징계를 받는 등 심각한 학내분규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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