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에는 미묘하고 민감한 내용이 담겨있다.
어제의 권력이 살아있는 오늘의 권력에 딴지걸고 찬물을 끼얹는 경우라면 그만큼 신-구 권력 간의 갈등이나 긴장감은 커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은 그래서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회고록 출간의 시의성(時宜性)이나 내용의 적절성 등에서 시비 거리가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 국회부결은 박근혜대통령이 정략적 의도로 주도했다”는 주장은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는 박근혜대통령의 퍼스넬리티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또 회고록에서는 이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추진 문제와 관련한 비밀 접촉사실의 이면을 공개했다.
이는 현 정부가 집권 3년차의 승부수로 남북정상회담 성사 등 남북관계 개선을 추진 중인 와중이어서 정부의 대북정책 등 남북관계에 치명상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회고록에는 “원자바오 전 중국총리가 김정은 정권의 장기집권은 역사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취지의 내용도 있다.
외국정상의 은밀한 발언 내용을 까발리는 매우 적절치 못한 외교적 결례라는 비판도 있다.

여기에다 ‘자원외교와 4대강 사업’등에 대한 지나친 자기 확신과 변명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국회에 대한 전면적 선전포고로 비쳐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회고록 집필에 관여했던 일부 인사는 “이번 회고록엔 정치적으로 민감성 있는 얘기는 전부 뺀 것”이라고 했다.
말의 행간에는 “이번에는 뺐지만 다음번에는 이러한 민감한 부분까지도 까발릴 수 있다”는 엄포가 숨어있다.
상당히 정치적 포석이 깔린 발언이다. 현 정권에 대한 시위나 경고로도 읽혀지는 대목이다.

의도적이고 정략적인 ‘회고록 출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남들이 네게 무슨 짓을 저지르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짓을 저질러 버리라”는 작심한 듯 한 선제공격의 느낌도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은 지켜야 할 금도와 절제가 있는 법이다.
치적 홍보의 자화자찬이나 변명으로는 집필의 순수성이나 진지성을 담보 받을 수가 없다.

“자서전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점을 밝힐 때만이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조지 오웰의 말이다.

회고록이나 자서전이나 참회록은 ‘붕어빵’ 찍어내듯 틀에서 뽑아내는 작업은 아니다.
오랜 시간의 자기참회와 고백의 과정을 통해 준비해서 집필하는 객관적 삶의 서술이다.

‘루소의 고백록’이 그 전범(典範)이다.
1766년부터 쓰기 시작한 고백론은 1770년에 탈고 했다. 그때부터 내면을 다스려 다듬고 다듬었다. 출간은 그의 사후(事後·1782년)의 일이었다.

루소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고백하려는 집념, 스스로 혐오스런 악덕이라 일컫는 것들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서술했다고 했다.

그래서 루소의 고백록은 “인간이 스스로 얼마나 솔직해 질수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척도로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자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을 써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처칠은 1948년부터 6년간 자료조사와 집필과정을 거쳤다.
처칠의 회고록이 고전처럼 읽히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자신의 내면을 성실하게 고백하는 객관적 서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어떤가. 퇴임 두 달 뒤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800쪽 짜리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나 그 방대함 속에는 재료의 신선도보다는 조미료를 너무 많이 쳐 순수한 맛을 잃어버린 요리와 같다는 지적이 많다.

회고록이 자신의 일방적 치적 홍보나 변명의 도구로 이용되거나 공격용으로 악용된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의 회고록일 수는 없다.

‘대통령의 시간’이라는 회고록이 출간되기 전부터 긍정보다는 부정적 이미지로 덧씌워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하겠다.

역사가 이를 우호적으로 평가할지, 비겁한 변명의 기록자로 기록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회고록을 놓고 벌이는 살아있는 권력과 지나간 권력 간의 감정적 힘겨루기가 상생보다는 상극(相剋)의 덫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이들의 조마조마한 일촉즉발의 초읽기를 보면서 ‘전갈의 우화’가 떠오르는 것은 여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수 분열’의 전조증상을 보는 것 같아서다.

‘전갈이 강을 건너야 하는 데 헤엄을 못친다. 강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데 마침 개구리가 튀어 나왔다.
“개구리야, 네 등에 나를 태워 강을 건너게 해다오” 전갈이 사정했다.

“네 독침이 내 등을 찔러 내가 죽을 터인데 어떻게 너를 등에 태우겠니” 개구리의 거절이었다.
“독침을 찔러 네가 죽으면 나도 강물에 빠져 죽을 것이 뻔한데 어떻게 너에게 독침을 찌를 수 있겠나” 전갈은 진지했다.

전갈의 말에 안심한 개구리가 전갈을 등에 태웠다.
한참 헤엄쳐 강 중간쯤에서 전갈이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렀다.
죽어가던 개구리가 말했다. 내가 죽으면 너도 물에 빠져 죽을 터인데 어찌 이런 짓을 했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던 전갈이 하는 말, “그것이 나의 본성이거든”.

현 권력이 개구리이고 지난 권력이 전갈이라면 ‘보수 분열’의 전조 증상은 ‘전갈의 우화’로만 웃어버릴 일만은 아니지 않는가.
함께 사는 일보다 함께 죽는 일이 ‘보수의 본성‘이라면 더는 할 말이 없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