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6주기 추도식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발언이었다. 사실상의 ‘정치 입문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계산된 의도는 격정적이기는 했지만 독성이 묻어있었다. 예의나 품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패거리들의 잠자던 증오심에 불을 지폈다. ‘내 편’, ‘네 편’으로 편을 가르고 갈등과 분열의 쌍심지를 돋우어 올렸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42)씨 이야기다. 23일 김해시 진영읍 봉하 마을에서의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6주기 추도식에서 있었던 건호씨의 발언은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날 추도식에는 여야 정당대표와 각계 인사, 시민 등 3천여명이 참석했었다.
여당 대표로서는 김무성 대표가 처음으로 참석하여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앞줄에 나란히 앉았다.

추도식은 말 그대로 ‘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기리고 애도하는 엄숙한 자리’다.
노전대통령의 장남인 건호씨는 이 엄숙한 제사의 중심에서 추도객들에게 정중한 예를 갖추어야 하는 제주(祭主)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머리 숙이는 겸손한 예양(禮讓)이 제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럼에도 건호씨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담대하고 거침이 없었다.
제삿집 아들로서의 예의와 절제는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외투였을지도 모른다.
건호씨가 유족 인사말을 통해 쏟아낸 발언의 웅덩이에는 분노와 증오와 야유와 조롱이 구정물처럼 고여 있었다.

유족 인사 발언을 하던 중 그는 앞줄에 앉았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겨냥했다. 사실상 정조준이었다.

“특별히 감사를 드릴 손님이 있다. 전직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면서 피를 토하듯 대화록을 읽던 모습이 선한데 어려운 발걸음을 해 주셨다.
권력으로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것도 모자라 선거에 이기려고 국가기밀 문서를 뜯어서 읊어대고 아무 말 없이 언론에 흘리고 나타나니 진정한 대인배의 풍모를 뵙는 것 같다“고 했다.

반어적 수사를 동원한 야유와 조롱이었다.
건호씨의 기총소사 같은 발언은 계속됐다.

“혹시라도 내년 총선에는 '노무현 타령‘, ’종북타령‘은 안 하려니 하는 기대도 생기지만 ’뭐가 뭐를 끊겠나‘ 싶기도 하고 본인도 처벌받거나 반성한 일이 없으니 헛꿈을 꾸는 것 아닌가 싶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오해 말라. 사과와 반성, 그런 것은 필요 없다. 제발 나라를 좀 생각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국가 최고 기밀인 정상회담 회의록도 선거용으로 뜯어서 뿌리고 권력을 동원해 소수파를 말살하고 권력만을 움켜쥐고 사익만을 채우려 하신다면 엄중한 시기에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하느냐, 국체를 소중히 여기라”고도 했다.

사과와 반성도 필요 없다는 오만과 독선, 나라와 국체를 걱정하는 고고한 애국적(?) 주문은 국가 원로 지도자급 조언에 버금가는 애국적(?) 수사이거나 아랫사람에게 일갈 하듯 건방진 가르침(?)으로 읽혀질 수 있는 대목이다.

건호씨의 애틋하고 절절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권력의 핍박으로 스스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고 믿는 한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상황에 대한 증오와 한이 지난 6년간 가슴에 멍으로 새겨 졌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자식으로서의 피 토하고 싶은 심정 역시 따뜻한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을 터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숙(自肅)해야 하는 아버지 제삿날이다. 그런데도 자중자애(自重自愛)로 제사를 모셔야 할 제주가 추모하러 찾아온 특정인을 겨냥해서 면전에서 면박하고 야유와 조롱을 보내는 것이 온당한 일이었는가.
그것도 3천여명이나 지켜보는 가운데 망신을 줘야 아버지 제사를 모시는 제주로서 후련하고 시원한 일이었는가.

노전대통형은 생전에 ‘지역통합’ ‘세대통합’ ‘계층통합’ 등 이른바 ‘3통 실현’에 애썼던 이다.
화합과 소통과 균형적 국가 발전이 그의 키워드였다.
노전대통령 유언의 핵심은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건호씨의 발언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유언을 팽개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돌아가신 분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건호씨는 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리거나 정신이 헛갈려 갈팡질팡 하는 미혹에 빠질 나이가 아니다.
불혹(不惑)을 넘어섰다. 언행에 있어 앞뒤좌우를 분별할 줄 아는 나이인 것이다.

그러기에 유족 인사를 활용한 특정 정치인 망신주기는 특정 목적을 위한 계산되고 준비된 의도적 발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발언의 시의성이나 적절성에 대한 시비는 그만 두고라도 발언은 매우 정치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그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을 빌어 정치입문을 선언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노무현 타령’, ‘종북타령’을 매개로 한 내년 총선 발언은 역설적이게도 내년 총선에 뜻이 있음을 은근히 내비친 심리표출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또 다른 발언의 의도는 ‘친노’대 ‘비노’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 ‘'친노 진영'의 결집을 노린 작심발언이라는 해석이다.
확실한 편가르기를 통해 ‘친노’ 그룹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다는 일각의 분석은 그만큼 설득력을 얻고 있다.
추도식장에서 나온 ‘비노 인사’를 향한 거친 욕설과 야유, 물세례는 건호씨의 발언이 가져다준 효과 있는 임펙트였다.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추도식에 앞서 자신의 페이스 북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제발 분열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 누구도 노무현 이름을 정치마케팅으로 팔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웃기는 이야기다. 이는 노무현 이름을 독점하겠다는 사실상의 노무현 마케팅이라 할 수 있다.
‘노무현 이름’을 말하는 순간 이미 ‘노무현 마케팅’이 시작된 것이다.

건호씨 역시 ‘유족인사’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으로 ‘친노’와 ‘비노’, 새누리당과의 갈등과 사실상의 분열구도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분노와 증오를 동원한 건호씨의 발언이 분노조절 장애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의도된 고도의 정치적 마케팅이라는 분석이 가능한 이유다.

“분노는 전쟁의 아들이고 증오는 두려움의 딸이다”. 세네카의 말이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심을 뿜어낸다면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 온다”고 했다.
“화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 던지려고 뜨거운 석탄을 쥐고 있는 것과 같다. 결국은 자기만 화상을 입는다”. 전해내려 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분노조절 기제로 ‘용서의 담론’이 떠오른다.
법정스님의 법문집 1권(一期一會 )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서를 통해 나 자신이 용서받게 됩니다. 또 그만큼 내 그릇이 성숙해 집니다. 마음에 박힌 독을 용서를 통해 풀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에게 “자비와 용서를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땅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땅은 언제나 자비롭고 용서하며 너그럽다”.‘

불기 2559년 ‘부처님 오신날‘ 아침,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땅의 교훈’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여간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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