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이야기] 이병주의 "지리산" 일어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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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이야기] 이병주의 "지리산" 일어 출판
  • 제주투데이
  • 승인 2015.09.0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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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년간 번역하면서 그 내용을 잊어버린 적은 없습니까?" 아무리 원본을 앞에 두고 번역한다지만 언제나 이 일에만 매달릴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일상들이 곁들여져 번역에서 손을 놓거나 집중력의 해이로 스스로가 번역한 내용은 물론 통일되어야 할 언어와 어휘 사용들을 잊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번역 시간을 두었습니다." 전7권의 <지리산>을 지난 8월에 일어판 번역을 발간한 마쓰다 노부히로(松田 暢裕. 45) 씨의 말에 <지리산>을 마치 일기장처럼 매일 접했다고 필자는 느꼈다.

855쪽의 상권과 837쪽의 하권으로 묶어서 일어판 <지리산>을 도호(동방)출판에서 발간했는데 일반 사전과 다름없는 부피와 무게가 있었는데 외형적인 그 무게보다 내용은 더욱 짙고 중량감이 있는 <지리산>이었다.

마쓰다 씨는 상,하권의 독자적 해설을 하면서 상권에서 <지리산>을 번역하게 된 과정을 썼는데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연쇄 반응의 결실이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상권 해설을 마치면서 내가 <지리산>과의 만나게 된 경위를 쓰겠다. 나는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바현(千葉縣)에서 지냈고 교사가 되기 위해 나라현(奈良縣) 나라교육대학에 진학했다.

나라교육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으로부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나 근대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러한 역사를 몰랐던 나는 아주 부끄러웠다.

그 후부터 일본과 조선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대학 3학년인 1992년 에 나라 덴리(天理)시에서 열린 강제연행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 집회에 참가했다.

전쟁 말기인 1944년 덴리시 야나기모토(柳本)에 야마토해군항공대의 비행장이 군의 발주를 받고 오바야시구미에 의해 건설되어 3천인의 조선인이 노동자로서 강제연행되었다.

그 건설 지역 안에는 위안소가 만들어 지고 20여명의 조선인 여성이 성노예가 되었다. 그 때의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피해자인 김 영돈(金 永敦) 씨와 송 장용(宋 將用) 씨가 당시의 증언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내일했다.

또 종군위안부로서 처음으로 이름을 밝힌 김 학순(金 學順) 씨의 증언을 듣는 모임도 나라시에서 열려서 참가했다. 그 분들의 이야기는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 2년간에 걸쳐서 무시, 험담, 폭력 등 심한 이지메(괴롭힘)를 당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지메에 대해서는 격렬한 분노를 갖고 있었지만 자기 나라가 국가적으로 타국을 괴롭혔다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이 끊기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를 모른 채 교사는 안 된다고 강하게 느꼈다.

그 생각이 커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나라교육대학을 졸업하여 한국 연세대학교에 유학했다. 유학 초기에 알고 의기투합한 최 호진(崔 浩眞)이라는 친구 집에서 1년간 도움을 받았다.

호진은 같이 생활하면서 철저하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리고 거의 매일 밤 역사인식이나 일.한문화비교, 근로(勤勞)관이나 연애관에 대해서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였던 곳과 서대문형무소, 독립기념관 등 여러 곳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 최 호진 방의 서가에 있었던 것이 <지리산>이었다. 호진이는 내가 귀국하기 조금 전에 <지리산>의 페지를 펼치면서 식민지시대와 빨치산의 비극에 대해 들려주면서 언젠가는 <지리산>을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하여 달라고 말했다.

최 호진의 말을 잊을 수 없어서 귀국 후에도 한국어 공부를 계속하여 30세부터 7년간에 걸쳐서 <지리산>을 번역했다. <지리산> 전7권을 완역한 것은 좋았지만 번역을 마치고 출판해 줄 출판사가 없는 것을 알았다. 정말 무모한 일을 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아랑곳 없이 출판사에 말을 했지만 어디서도 응해 주지 않았다. 관심을 갖어 준 출판사도 있었지만 전7권이라는 분량이 걸림돌이 되면서 좀처럼 출판까지 얘기는 진전되지 못 했다.

그럴 때에 상담에 응해 주신 분이 저널리스트인 카와세 슌지(川瀬 俊治. 68) 씨였다. 카와세 씨가 없었으면 <지리산>을 일본에서 출판할 수 없었다. 정말로 감사해도 다 못할 정도의 마음으로 가득하다.

내가 1992년에 충격을 받고 한국 유학의 동기가 된 천리시 야나기모토 비행장 강제연행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 집회와 종군위안부 피해자 김 학순 씨의 증언을 듣는 집회를 계획, 주최한 사람이 카와세 씨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어 인간의 인연의 묘(妙)를 느끼고 있다.

"<지리산>의 일본에서의 출판에 대해서 카와세 씨 이외에도 여러면에서 결려해 주시고 본서를 위해서 훌륭한 제자(題字)와 시를 제공해 주신 블르스 가수 아라이 에이치(新井 英一. 동포가수) 씨, 지리상 현지취재와 원작 출판사 한길사와의 가교 역할을 해주신 한국 그린 코리어 서 재철(徐 載哲) 형, 일본에서의 출판을 쾌히 승낙해 주신 한국 출판사 한길사와 이 병주 씨의 장남 이 권기(李 權基) 씨, 출판 비용을 원조해 주신 한국문학번역원 의 여러분들. 출판 애기가 진전되지 못할 때에도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준 직장의 동료, 나라교조의 동지, 식자학급(識字:주로 일본어를 공부하는 모임. 외국인이 많음)의 여러분, 소중한 친구들, <지리산>을 소개해 주고 또 본서를 위해서 지리산 사진을 제공해 준 나의 친구 최 호진. 가정 일과 아이들 뒷바라지 가족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면서 번역을 하는 나를 따뜻하게 응원해 준 마누라와 아들 딸.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리산>을 내주신 도호출판회장 이마히가시 시게토(今東 成人) 씨와 편집부 키타가와 미유키(北川 幸) 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상이 마쓰다 씨가 <지리산>을 번역하게 된 동기이다. 전문을 소개한 이유는 전문 번역가도 아닌 마쓰다 씨는 1970년 지바현에서 태어나서 나라교육대학 졸업 후, 1993년부터 1994년 1년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유학, 신토쿄국제공항(현 나리타국제공항) 수입물자 반입의 일에 종사하다가 1996년부터 나라현의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번역 전문가도 아닌 마쓰다 노부히로 씨지만 교사로서 객관적 역사인식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겠다는 그의 신념이 <지리산>이라는 대작을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끈기 있는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카와세 슌지 씨 말에 의하면 야나기모토 비행장에서의 강제노동과 위안소 설치 사실은 1995년 덴리시에 사는 시민과 역사학자, 시민운동가들과 덴리시와 시교육위원회가 같이 협의하여 강제동원의 역사를 기술한 안내판을 만들어 시립공원에 세웠다.

이 안내판을 보기 위해 1995년부터 철거 전까지 일본 전국에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덴리시 현지를 방문했었다. 또 덴리시에 사는 주민이나 역사가가 관광객에게 조선인을 동원한 일본의 가해 역사를 설명하거나 고장을 안내할 때 도움이 되었었다.

그런데 2014년 4월에 갑자기 덴리시는 이 안내판을 철거했다. 20년간이나 세워둔 이 안내판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철거 당한 것이다. 안내판에 대한 항의를 받고 철거했다는데 일본 우경화 바람이었다.

지금 이에 대한 항의 집회와 서면운동을 벌이면서 덴리시장의 분명한 자세 표명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애매모호한 상태 속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지만 한국에서도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그 추이를 직시하고 있다고 한다.

카와세 슌지 씨에 대해서 제주투데이에 필자가 쓴 기사를 소개한다. 상기 내용과 다르지만 2012년 12월에 독도에 대해서 쓴 기사이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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