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이야기> 이인영 한국예술원회원 일어판 <신목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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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이야기> 이인영 한국예술원회원 일어판 <신목근통신>
  • 제주투데이
  • 승인 2015.12.0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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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여러분.

"동해(일본해)에 떠 있는 독도(다케시마)의 영유권에 관해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현재와 같이 우호 관계를 갖을 수 있었던 시기는 과거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위험한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이웃 일본은 애초에 우리들과 무슨 관계였을까. 일본열도와 일본인들은 본래 어디서 왔던 것인가. 그리고 일본어의 근원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일본문화의 원류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등등, 여러가지에 대해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에 깊은 관심과 우려 속에 여러 의문이 솟구쳐오릅니다."

원로 음악가(베이스 성악가) 이인영(李 仁榮. 88) 한국예술원회원이 9년 전, 1997년에 서울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한 일본어판 <신목근통신:新木槿通信>에서 "일본의 여러분(독도. 다케시마)"이라는 항목에 나오는 서두의 글이다.

(일본어로는 "일본의 여러분"<니혼노미나사마:にほんのみなさま:日本の皆様>이라고 해도 말이 되지만 우리말로는 어색하니까 알기 쉽게 필자가 괄호해서 "인"자를 넣었음)

9년 전이라면 일본에서는 한류 붐의 전성기였지만 독도문제는 햇병아리 날개처럼 들썩 들썩 날고 싶어서 기지개를 켤 무렵이었다. 지금은 파득 파득 날아버리고 있다. 당시 독도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한국의 "실효지배"라는 표현이 지금은 "볼법 점거"라는 표현으로 바뀐 것이 그렇다.

금년 8월 12일부터 한국 국회의원회관에서 <"다케시마의 날"을 다시 생각하는 모임>의 구보이 노리오 이사장이 소장한 "신자료에 의한 독도의 올바른 인식 전시회"가 있었다.

이 전시회에 휠체어를 타고 관람하러 오셨던 이인영 씨가 일본에서 간 이 모임의 박 청 이사에게 자신의 저서를 고맙고 수고한다면서 주신 책을 동모임의 이사인 필자도 받을 수 있어서 읽었다.

태고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한.일관계에 대해서 역사가를 방불하는 지식과 논법과 혜안 속에 왜곡된 일본인의 역사론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는데, 비난만이 아닌 설득력에는 감동까지 불러일으킨다.

"한국 동해에는 을릉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군소재지이며, 인구가 약 1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섬에서 동남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문제가 되고 있는 독도가 있습니다. 이 섬은 한국에 속합니다."

"독도에서 제일 가깝다는 일본의 시마네현 오키섬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약 157킬로미터입니다. 즉 90킬로미터와 157킬로미터입니다. 한국의 을릉도로부터의 거리가 배 정도 가깝습니다."

일본의 어부들이 독도까지 와서 고기를 잡았다는 주장에는 일본의 동해(일본해) 지역의 어장은 항구에서 가까운 해역에서도 풍성했는데, 그 옛날 왜 거친 파도의 위험을 무릎 쓰고 절벽 투성인 고도의 독도까지 와야 했겠는가라는 지극히 솔직하고 상식적 의문을 곁들이면서 핵심을 찌르고 있다.

음악가로서 한∙일 양국만이 아니고 세계 각처에서 활동을 했던 이인영 씨가 많은 스승, 친구, 제자관계로 지금도 교류를 나누고 있는 일본에 대해 이렇게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반성을 촉구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 교류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인영 씨는 본문 "처음에"의 항목에서 "최근에 들어서 헛되게 늙어가는 자신에게 채쨕질을 하면서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유언과 같은 묵시가 내 마음에 거세게 흐르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적 초조감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것은 오늘 때문이 아니고 미래를 위해서 한국과 일본에서 태어날 청순하고 순진한 아이들을 위해서 꿈의 가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순수한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운 많은 일본인들의 격려의 말에 더욱 용기를 얻었습니다."

현실적 측면에서의 뜨거운 우정의 교류도 좋지만 좀더 심층적인 한.일관계의 역사인식을 파헤치고 진솔하게 활자화하므로 인해서 새로운 한.일관을 정립시키려는 원로의 달관이었다.

더욱 날카로운 비판은 2008년 11월에 쓴 36페지에 달하는 후지이(藤井 浩貴) 교수의 "음악에 보는 식민지기:植民地期 조선과 일본관련사"의 독후감이었다.

한국 음악계의 원로로써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편견 일변도인 이 논문에 대한 반론은 한국 서양음악의 개화기에 대한 사실과 객관적 근거 제시는 물론 또 하나의 일본론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반론의 글은 대한민국 예술원보에 게재되었다.

역사인식의 왜곡된 비판 속에서도 "일본에 보내는 연문(戀文)" "젊은 날의 나의 데뷰시절" 등은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 소개되고 있으며 "장미가 피었다"는 항목에서는 가슴 뭉클케 하는 압권의 장이었다.

"1965년 5월 일본을 5년 만에 방문하여 야타베 게이키치( 矢田部 勁吉) 은사댁에 전화를 했다. 전화에 나온 부인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름없었는데 전화 상대가 자신인 것을 알고는 전과는 다른 큰 목소리로 "김상!"이라고 부르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그 동안 소식도 없는 사이 고령으로 치매증에라도 걸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 변해 버려서 공중전화도 떨어트릴 뻔했고 눈물이 번졌다. 가만히 있는데 이번에는 웃으면서 노래까지 부른다."

"지금 일본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이에요. 장미가 피었다. 장미가 피었다. 새빨간 장미가... 당신이 심은 그 장미가 지금 한창이에요. 너무 큰 꽃이고 아름다워요. 해마다 김상 장미, 김상 장미가 있어서 커피도 거기서 마셔요. 빨리 오세요."

"아. 그랬었구나. 다시 눈물을 흘렸다. 1956년 일본 토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성악과를 졸업하는 해, 오페라 가수로서 처음 데뷰하는데 인사차 은사 야타베 선생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입장권 두 장만 드리기에는 안돼서 백화점에 선물을 사러 갔다. 단돈 천엔 밖에 없는데 꽃다발은 물론 어느 것 하나 그 돈으로 살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비료까지 곁들여 파는 조그마한 장미 묘목을 사고 가서 은사와 함께 정웓에 심었다. 9년 후, 그 장미가 만발하고 아름답게 피어서 부인이 감격한 것이다.

1956년 토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성악과를 졸업하여 뛰어난 음악활동을 한 이인영 씨에 대해서 일본 작가 다고 기치로 씨는 2010년 10월 6일 재일한국 민단신문 칼럼 "사람. 사랑"에 "밀항의 대가수 이인영"라는 제목 속에 쓰고 있는데 그 발췌문이다.

"해원(海原) 앞에서 청년은 계속고민을 했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미성(美聲)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하고 싶지만 아직 국교가 없다. 무리해서 현해탄을 넘으면 언제 고국에 돌아올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음악에의 정열은 모든 것을 넘었다. 1950년 밀항이라는 비상수단으로 청년은 일본에 와서 도쿄예술대학 성악과에 입학했다. 졸업을 전후하여 후지하라 극단에 입단, 김경식이라는 이름으로 베이스 가수로서 대활약을 한다."

"이인식 씨는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동양 제일이라는 미성이라고 불리우고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왕년의 대가수이다."

"종전(일본 패전)부터 5년 일본은 가난했고 조선인 차별은 짙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있었다. 도쿄예술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야타베 게이키치 씨. 외국인에의 차별 등 일절 관계없고 이 씨가 수업료를 못 내면 대신해 줬다."

"학교가 쉬게 되면 돈은 필요 없다면서 레슨을 받으러 오라고 권했다. 거기서 배운 것은 단지 가창력만이 아닐 것이다."

"1960년 이후는 서울대에서 가르치고 역사가 짧은 한국 양약계에 단기간 사이에 세계적 가수를 배출시킨 발전을 본 것은 이 사람의 노력이 크다. 젊은 학생에게 열심히 가르친 배경에는 야타베 씨로부터 받은 것이 메아리 치는 것 같다."

"일본에 직설적인 바른 말을 계속하는 그는 지금 한.일 양국을 숙지하는 인간으로서 해협을 넘고, 양국에 걸쳐서 큰 마음의 노래를 울려퍼지게 하고 있다."

조그만 통통배 어선을 타고 밀항으로 현해탄을 건넌 극한상황의 사실적 묘사를 비롯해서 재일동포 여러분에게, 그리고 일본 예대 동기생, 지인들과 나눈 편지들, 이 책이 나오기 전 교정까지 보면서

틀린 곳을 지적해 준 지인들의 글들까지도 있는 그대로 게재해 보여준 세심한 배려는 이 책의 무게를 더해 준다.

<신목근통신>이라는 제목은 친교가 있었던 김소운 시인이 일본어로 쓴 <목근통신>의 영향을 받아서 붙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인영 씨는 1956년 일본 토쿄예술대학 음악부 성악과 졸업, 그해부터 1971년까지 일본 후지하라오페라 단원, 1960년 서울대학교 음대 강사, 1969년 동대학 교수, 1994년 동대학 명예교수, 1986년 한국 성악아카데미회장, 1991년 일본 민음국제음악콩클, 도밍고 국제오페라콩클, 일본 시즈오카오페라콩클 등 심사위원 역임, 상훈으로서는 199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99년 보관문화훈장, 2010년 3.1문화상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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