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인생의 거의는 <재일>의 삶 속에서 지나버렸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진 속에서이어지고 있습니다."
 
"고난의 고향을 버리고 피해 온 나의 떳떳치 못한 과거들을 곁들여서 <회상기>를 쓴다는 것은 저에게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사실 저의 생에 대해 책으로 엮고 싶다고 말했던 큰 출판사의 후의를 사양했던 것도 20여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저 자신이 겪고 온 생에 대해 그렇게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실명을 밝힐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저의 재일의 삶 속에는 얽혀져 있으므로 회상기와 같은 글에는 일절 외면해 왔습니다."
 
2015년 제42회 오사라기 지로오(大佛 次郞)상을 수상한 김시종 시인의 "조선과 일본에 산다"(죠오센과 니혼니이끼루:朝鮮と日本に生きる)의 후기의 발췌문이다.
 
지난 3월 13일 저녁, 오사카 이쿠노에 있는 한국식당 신경애관에서 재일동포를 중심으로 오사라기상 수상 축하회가 열렸다.
 
전날 토쿄에서 가까운 요코하마에서 수상기념 행사를 마치고 신깐센을 타고 오사카에 오셔서 다시 기념축하회에 참석하신 김시종 선생님은 만87세이시다.
 
이 축하회에는 역시 토쿄에서 가까운 사이다마현 와라비시에서 작가 김석범 선생님께서 일부러 참석해 주셨는데 김석범 선생님은 91세이시다.
 
오사카와 토쿄의 거리는 서울과 부산 정도 떨어져 있다. 신깐센으로 3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여서 아무 것도 안하고 열차 타는 것만으로도 빈번하지 않는 비일상적이어서 피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쉴 여유도 없이 일상적인 생활처럼 이 축하회를 치르는 두 선생님을 대할 때, 그 행동력과 정신력에는 경이롭다.
 
축사에서 김석범 선생님은 김시종 선생님과의 관계를 말하면서 울먹일 때는 장내를 숙연케 했다. 긴 말은 없었지만 4.3에 대한 말을 하면서 재일을 사는 동포 원로 작가와 시인의 정이 넘치는 교류와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볼 때 <4.3사건>의 무잔한 체험이 저의 인생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됩니다."
 
"우선 <4.3사건>에 대한 과정에서 김석범과 김시종 대담지 <왜 계속 써왔던가, 왜 침묵해 왔던가>(일본 평범사)에 붙인 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교수의 해설문 <제주 4.3사건이란 무엇인가>의 요약을 빌려서 저의 설명에 대신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상기 수상 책의 "첫머리에" 첫 구절이다. 4.3으로 인해 본의 아닌 재일의 삶을 살아야 했던 김시종 시인의 <조선과 일본에 살다>는 창작 작품의 시집이 아닌 진솔한 자서전이다.
 
작가나 시인이 창작 작품이 아닌 자서전을 써서 문학상을 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김시종 시인은 5년 전에는 시집 <잃어비린 계절>로 다카미 쥰상을 수상했다.
 
이번에는 이러한 작품이 쓰여진 배경을 스스로가 자서전 형식으로 썼는데 이 내용이 높게 평가를 받고 오사라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모두 8장과 종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장. 악동(惡童)들 속에서. 제2장. 식민지의 황국소년. 제3장 해방의 나날. 제4장. 신탁통치를 둘러싸서. 제5장. 제네럴스트라이크와 백색테러. 제6장. 4.3사건. 제7장. 이카이노(猪飼野)에. 제8장. 조선전쟁(육이오)하에서 오사카. 종장.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이렇게 제1장에서 제6장까지는 한국 국내 이야기로 김시종 시인이 한국에 있을 때의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파란만장했던 김시종 삶이 시가 되었고 이 점을 높게 평가한 오사라기상 심사위원들의 안목에 필자는 신선감을 느꼈다.
 
이날 수상 축하회에서는 오광현 <재일본 4.3유족회>회장, 매년 일본에서 개최하는 <원코리어 페스티벌> 정갑수 대표, 리쓰메이칸대학 문경수 교수와 필자의 축사가 있었다.
 
모두 김시종 선생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말하면서 김석범, 김시종 선생님의 일본문학상도 좋지만 더 나아가서는 노벨문학상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김시종 선생님의 오사라기상 수상 소식을 아사히신문에서 읽고 알았다는 토쿄에 거주하시는 왕수영 시인은 필자에게 메일을 2월 1일 보내 왔었다.
 
신문을 읽고 그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 왔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내일부터 읽을 것이며, 선생님 만나면 축하드린다고 전해 달라면서, 너무 대단하시다면서 내 주위의 일본 친구들에게도 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축하회 날 필자는 김시종 선생님께 이매일을 프린트해서 직접 전했다. 
 
필자는 이날 축하 인사에서 김시종 선생님과 필자의 관계를 떠난 다른 차원의 인사를 했다.
 
"김시종 선생님. 제42회 오사라기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는 김시종 선생님 기사를 지금까지 약 10회 이상 써서 제주에 보냈습니다. 오늘 축하회건도 쓸 예정입니다."
 
"제가 제주나 서울에 가면 김시종 선생님은 어떤 시인입니까? 하고 자주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김시종 시인은 일본에서 이방인이며, 이단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1984년 제11회 오사라기상, 1998년 제39회 마이니치예술상을 수상한 김석범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재일동포 조직인 민단, 조총련은 물론 일본 문단에서도 같습니다."
 
"그러하신 김시종 선생님이 2011년에는 제41회 다카미 쥰상, 4년 후, 2015년에는 오사라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방인, 이단자라고 불리우면서도 그 반골정신을 꺾지 않고 관철 시켜온 김시종 선생님의 작품과 삶들의 신념에 일본 문단이 공명하고 감동하여 준 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수상작 <조선과 일본에 산다.>는 창작 작품이 아니고 김시종 선생님 스스로의 자선전이므로 그 의미는 더욱 깊습니다."
 
"지금 디아스포라는 언어가 경계인, 월경인이라는 말과 함께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김시종 선생님의 수상은, 그러한 벽이나 장해를 허물고 융해 시키는 커다란 상징성을 갖고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종장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에서 "49년만의 제주도"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1998년 10월, 생각이 응축된 채 제주공항에 만 49년만에 안사람과 내렸습니다. 거친 말과 항의 받을 각오를 한 고향 방문이었습니다만 대합실에 마중 온 외조카들은 원망의 말은 커녕 잘 살아나서 돌아왔다고, 같은 나이의 여조카는 목을 껴안고 떨리는 목소리 말하면서 울었습니다."
 
"이때 필자는 김시종 선생님과 사모님, 셋이서 같이 제주에 갔었습니다. 이 감동의 재회를 저는 바로 옆에서 보았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은 일본에서 저 혼자 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면서 저의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끝으로 김시종 선생님의 인사말이 있었는데 김석범 선생님과의 만남을 들려 주시면서 지금도 형님처럼 생각한다는 원로 시인의 독백에 가까운 인사는 또 한번 장내를 숙연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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