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윤덕 작가의 '제주 4.3' 그림책 <나무도장> 중 일부 @평화를품은책 제공

4.3은 어려운 이야기다. 진실에 꼬인 관계들이, 역사를 ‘그대로’만 바라보기 어렵게 한다. 때문에 하나의 이름, 하나의 단어 모두 조심스러운 이야기다. 앞과 뒤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우리의 역사. 그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쉽지 않았다.

4.3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나무도장>의 권윤덕 작가를 만났다. 3년여 작업의 시간 동안 부담이 컸단다. 섣부르게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긴장. 방대한 자료를 하나씩 마주하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화해와 상생’의 결론을 맺으려 했던 고민.

그래서였을까. 출판된 책을 들고 제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간의 시간들이 쑥 스쳐지나갔다는 말 뒤에, 곧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고생의 기억도 있어서겠지만, 아픈 그 역사를 한동안 절실히 마주했던 시간의 마침표였기 때문일거다.

△책은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작업을 시작했는가

시작은 2013년 4월이었다. 출판사에서 제안이 먼저 들어왔다. 무명천 할머니 이야기로 제안이 들어왔지만, 자료를 찾다보니 알면 알수록 4.3 사건을 다 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특정 인물의 이야기보다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를 엮게 됐다.

△'빌레못굴의 학살'을 소재로 한 이유는?

진상조사보고서, 미군자료, 국내 속기 회의록들. 증언집들을 다 찾아서 읽었다. 동굴속의 많은 사례들을 접하게 됐는데, 그 중 일곱달 된 아기를 바위에 던져 죽인 ‘빌레못굴의 학살’을 핵심 모티브로 잡았다. 슬픈 이야기를 문학적 허구로 바꿔 지옥 같은 학살의 역사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내고 싶었다.

△주인공 시리가 엄마에게서 받은 ‘나무도장’의 의미는?

민간인 학살된 곳에는 꼭 도장이 발견된다. 옛날에는 집문서에도 필요했고, 이름을 등재하거나 할 때도 필요했다. 나무도장은 집안의 대를 잇게 해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긴박한 순간에 아이에게 도장을 쥐어준 것은, 식구들이 다 죽어도 그 애가 어떤 아이인지 대변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 아이가 도장으로 자신을 찾아가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자료조사를 위해 찾은 '큰넓궤' 앞에서 권윤덕 작가가 영령들에게 묵념하고 있다. @'<나무도장>을 만들기까지' 영상 중 발췌

△화해와 상생, 사실 쉽지 않은 얘기다.

그림책을 할 때도, 사실 ‘토벌’에 나섰던 외삼촌에 대한 얘기가 제일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지시명령에 따른 하수인으로만 다루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을지도 모를 외삼촌은 시리를 구해내고 키워낸다.

당시 가해자였던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이야기를 피해자처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화해와 상생이 되려면 그 얘기들도 꺼내져야 한다. 공공적인 얘기로 나오면, 인간에 대한 성숙으로 수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몰아가면 또 다시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올 기회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4.3의 아픔과 제주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담아내는 '그림' 작업은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나무도장>을 만들기까지' 영상 중 발췌

△책에 담고 싶었던 이야기는?

자료를 조사하면서 마음속에 생겼던 이야기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였다. 물론 국가가 이미 사과하고 제주가 아픔을 넘어 평화의 섬으로 간다는 사회의 결론은 나와 있다.

제가 덧붙이고 싶었던 것은, 자기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빨갱이’로 분류해서 적으로 만들고 제거하는 사회. 이건 앞으로도 다른 형식으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조율하고 협의하고 조정하는 훈련들이 필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음 했다.

또 한 가지는 ‘제주 사람들이 꿈꿨을 세상은 무엇이었을까?’이다. 당시 해방이 되고 나서 많은 이들이 꿈을 안고 제주에 왔을 것이다. 일상적인 꿈도 있지만 조선시대가 끝나고, 식민지가 끝나고, 근대사회 더 나아가 현대의 제주 섬을 어떻게 행복한 섬으로 만들까 하는 그런 꿈이 대단했을 것이다. 4.3의 많은 흔적 속에서 그 꿈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나무도장> 중 일부 @평화를품은책 제공

△재심사, 대통령의 추념식 불참 등 ‘화해와 상생’에 대한 태도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동전의 양면 같다. 한편으로는 ‘화해와 상생’으로 가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정치적 의미가 더해져 왜곡된다는 생각이다. 좌우로 몰아놓고 싶어 하는 것은, 그렇게 몰아놓는 순간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거다.

국가도, 이미 사과까지 했으니 뒤로 빠져서는 안 된다. 전체의 아픔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게 당연히 국가여야 한다. 왜 자꾸 당사자간의 문제로 돌리는지 안타깝다.

직접 그림책<나무도장>이 담긴 영상을 들고 초등학교를 찾아가 모니터링을 했다. 아이들은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쏟아냈다고 한다. @'<나무도장>을 만들기까지' 영상 중 발췌

△그림책을 들고 직접 초등학교를 찾아간 것으로 안다. 아이들의 반응은?

하중초와 승지초를 방문했다. 아이들은 ‘빨갱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더라. 질문이 한도 끝도 없었다. “선생님, 대체 빨갱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에요?” “군인이나 경찰은 민간을 보호해야 하는 데 왜 죽였어요?” “빨갱이라고 그렇게 죽여야 해요?” 등등 많은 질문들이 있었다.

특히, 군인과 경찰에 대해 "그들도 피해자 아니냐. 오히려 그 뒤에 나쁜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던 한 아이의 질문이 기억난다.

그런 질문을 갖게 되면 아이들은 이제 자료를 찾아 제주 4.3사건에 대해 찾아보게 된다. 역사적인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교육은 ‘공감’이다. 주인공 시리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 사회에 아픈 사람이 있다는 걸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본다.

△제주 4.3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아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제주만의 풍경이 있다. 중산간의 장엄함. 예사롭지 않은 제주의 나무. 그런 것들을 아름답게 담는 게 어려웠다. 특히 4.3의 아픔을 색으로 표현하는 채색작업을 많이 고민했었다. 겨울의 한라산, 학살의 순간에 담은 푸른 빛 등이 그 고민의 결과다. 나뭇가지의 경우 따로 색을 칠하지 않았다. 사람 마음을 휘젓듯 나뭇가지의 형태를 그대로 담으려고 했다. 슬프고 아름다운 제주를 표현하려고 했다.

권윤덕 작가△1960년 경기도 오산△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과 △1995년 첫 그림책 『만희네 집』 출간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 『만희네 글자벌레』, 『시리동동 거미동동』, 『고양이는 나만 따라해』, 『일과 도구』, 『꽃 할머니』, 『피카이아』 △2010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과 CJ그림책상, 2013년 일본군 ‘위안부’유공 여성가족부장관상, 2014년 ‘올해의 여성문화인상-청강문화상’

△책이 나온 이후, 사람들의 반응은?

책을 만들기 위해 취재할 때 여러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도움을 주시면서도 많은 우려들을 하시더라. 얼마나 담기 어려운 얘기인지, 잘못 담으면 안 된다면서 많은 자료도 내주시고 설명해 주셨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편협적인 그림책이 되지 않도록 간절히 얘기해 주신 분도 계셨다. 스스로도 그간 다른 많은 분들이 해온 것에 피해가 되면 안 된다는 부담이 많았다. 또 영령에 받친다 했을 때, 그분들의 희생에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이야기를 담아서 들고 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다.

책이 나온 이후에는 도움주신 분들의 반응은 좋았다. 사실 단어 하나부터, 그림 그릴 때 총의 종류, 모자의 마크와 각도 까지 다 고증을 받았다. 그렇게 하나 하나 사전에 확인 작업을 거쳐서 책이 나왔으니, 인정하고 봐주시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

4.3 사건의 좌절을 겪고서도 이제 다시 꿈을 이야기하고 평화 인권을 이야기 하는 제주인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사실 좌우를 넘어 '인간의 존엄'이라는 걸 가장 잘 얘기할 수 있는 곳이 제주가 아닐까 싶다. 대립과 갈등이 있었던 이곳에서 만들어진 가치들이 여러 사회에서 귀감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림책 <나무도장>의 핵심 모티브가 된 '빌레못굴', 4.3연구소가 2013년에 낸 '제주4.3증언집<빌레못굴,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진-빌레못굴@문화재청 제공>

“제일 처음엔 아기 안은 여자가 나오더라.” 하는 거라. 그건 우리 외삼촌이라. 애기는 한 일곱 달쯤 됐을 거라. 그 굴이 그냥 걸어 나오지 못해. 이렇게 올라와야 나오는 데라. 게난 경찰관 보고 “아일 맡아줍서” 헌 모양이라.<중략>. 그 사람이 아일 맡아가지고 애기를 돌에 내부쳐서 죽여 버렸어. 그러니깐 그 꼴을 보면서 이젠 나와 가지고 어멍이(엄마가) 꼭 같이 달라붙은 것 같애. 그러니깐 어멍을 개머리판으로 부숴버린 것 닮아. 이 해골 박세기가 바싹 부숴져버렸어. 거 내 추측인데, 애기는 순경이 내부쳐서 죽인 건 맞아. 돌에. 세상에, 애기를 돌에 내부쳐서 죽였다는 거라. 글쎄, 일곱 달 된 애기라. 참 애기도 잘 났데. 지금 살아시민 육십일 거여. 그 애기를 돌로 내부쳐서 죽여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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