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암 예술이 왜, 어떤 이유에서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지속적으로 연구를 해 나가야 합니다"

6일 소암 선생 추모사업회의 주관으로 서귀포학생문화원에서 열린 '소암 선생 서거 6주기 기념 세미나'에서 최 열 가나아트센터 기획실장은 '소암 선생을 어떻게 기릴 것인가'에 대한 주제발표에서 이 같이 말했다.

최 실장은 "올해 소암선생추모사업회가 결성되고 소암현중화기념관 건립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사업회와 기념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몇 가지를 제안했다.

우선 "사업회는 소암 선생의 예술 세계에 대한 가치를 서귀포나 제주 시민사회는 물론 훨씬 확장된 지역으로 확산, 선양해 나가는 핵심세력이 돼야 한다"며 "아무리 높은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 하더라도 사업의 계획과 실천의 통제가 부적절하고 표준조차 없이 빈곤과 방만의 양극단을 방황한다면 그 사업은 난관에 마주칠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소암 선생 기념 사업에 대해 "사업회가 기리고자 하는 인물인 소암 선생의 예술세계에 관한 관심의 집중을 유도하는 사업과 그 예술세계를 담는 기념관의 경영에 관한 충실하고도 미래 전망이 확고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기념관 운영에 대해서는 "초기의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을 장악하기 위해 개방형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한편 수용자 중심의 기획과 마케팅이 철저히 관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날 세미나에는 이승찬 서귀포시 문화공보실장이 참석해 추진중인 '소암 현중화 기념관 건립 계획'를 설명했다.

또한 토론자로 서예가 현민식씨, 서예가 양상철씨, 소설가 오성찬씨, 건축가 김석윤씨가 참석해 토론을 벌였다.

서예가 현민식씨는 소암 선생 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소견을 밝혔고, 서예가 양상철씨는 현대 서예가 읽는 서예가 아닌 보는 서예로 바뀌고 있는데 소암 선생 작품은 보는 서예로 적합하다고 말했다. 또한 소설가 오성찬씨는 기념관은 백년대계를 위한 것인만큼 규모나 여러 면에서 적당한지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고 건축가 김석윤씨는 기념관이 문화지역센터로써 지역 주민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날 최 열 가나아트센터 기획실장의 주제 발표에 앞서 서예평론가 정충락씨는 '법외지법의 멋을 쓴 서단의 신선' 발표에서 소암 선생을 왜 기려야 하는지 선생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통해 설명했다.

<다음은 정충락씨의 발표 전문>

法外之法의 멋을 쓴 書壇의 神仙

정충락(서예평론가)

1. 서언에
인간의 세상살이는 미묘하면서도 복잡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한편으로는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세상살이이다. 그 재미라고 하는 것을 현실과의 摩擦에서 힘들여 얻게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생활흔적을 바람직한 것으로 챙겨서 적어나가는 경우에서 우선하여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러는 수 십 년 동안이나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쓰는 경우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어떤 경우의 사람이든 모두가 스스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나름의 대본이 있게 마련이고, 加減할 수 없는 그 대본에 따라 스스로가 연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자신의 생활흔적을 긍정적으로 남기고자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남기는 자신의 발자취는 뒤에 남은 사람들이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또다시 구체적으로 평가(?)를 하게된다. 그렇게 평가를 하는 가운데에는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서 남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더러는 섭섭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세상을 하직한 얼마 뒤부터는 人口에 膾炙되는 것이 세월이 옮겨가는 것과 함께 정비례하여 긍정과 부정을 불문하고 엷어지게 마련이다.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情또한 멀어지는 것이 人之常情인 것을 어찌할 것인가.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 선생(1907∼1997)께서 우리와 緣을 달리한 것이 벌써 여섯 해를 넘기고 일곱 해째 들어섰다. 바로 엊그제 같은 일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그러나 소암 선생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를 함께 하고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선생께서 사신 흔적들이 즐비하게 우리들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것이 가장 우선하는 이유이고, 그 다음이 선생의 예술사랑 정신이 언제나 선생을 잊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1989년의 5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당시 서예관)에서 소암 선생을 처음 뵐 수가 있었다. 한국서예협회가 창설되어 처음 실시한 제1회 대한민국서예대전의 심사현장에서였으며, 그 때 소암 선생께서 필자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은 '농산, 자신을 뒤로하고 우리를 우선하는 公先私後를 아시지?' 였다. 이 한 마디에 소암 선생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이 소암 선생에 대한 필자의 첫인상이자 확실한 이미지였다.
소암 선생께서는 필자에 대하여 적당히 알고 계신 듯하였으며, 필자의 역할과 발휘해야할 기능에 대한 것도 첨언해 주신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소암 선생께서 원하셨던 부분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죄스러움이 부분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밝혀두고, 이제 소암 선생께서 남기신 서예가로서의 흔적에 대하여 필자의 짧은 소견을 펼쳐 보기로 한다.

2. 生涯에 관하여
소암 선생께서는 한 세기를 풍미하신 그야말로 名人中에 名人이시다. 愛書好酒는 소암 선생의 생활신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함께 술을 마셔본 기억은 없다.
1907년 7월(음)에 태어나서 1997년 12월 3일에 생을 마감하셨으니 정확하게는 90년 4개월 여를 이 세상에서 계셨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家學으로 서예와 학문의 연을 맺고, 지금 같으면 보통의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나이에 당시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결혼을 했으며, 그 다음해에 渡日하여 오오사까(大阪)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모모야마(桃山)中學校를 수료하고, 도오꾜(東京)로 자리를 옮겨서 학문의 길을 더욱 넓혀나가게 되는데, 이 때에는 어렵사리 고학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학교에서 배운 老子道德經의 영향은 선생의 철학으로 자리를 하게되어 일평생 悠悠自適의실천을 하게 된 것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와세다(早稻田)대학 政經學科專門部 2학년을 졸업하였으니 이 때가 선생의 나이 스물 여섯 되던 해였다. 2년 뒤에 東寶暎畵株式會社에 입사하여 화면에서 보여주는 字幕 쓰는 일을 하였으며, 또한 일본국회 사무처, 광산회사의 사무원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29세에 그곳 일본에서 일본인 하이꾸(俳句/一行時)작가인 호리우찌(堀內)여사와 결혼을 하게되고 슬하에 2男 3女를 두게된다.
소암 선생은 31세부터 본격적인 서예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당시 일본이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마쯔모도 호오쓰이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3년을 연서하게 된 것이다. 이 마쯔모도 선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본식이라 이해하고 있는 약간은 괴팍한 서예를 하는 경우가 아니고, 누구에게나 바로 통하는 서예의 본질을 형상화하는 정통서예가이다. 지금의 일본 서예는 전후 新表現의 擡頭에 의하여 그들 나름의 조형세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그 시기를 일본서예의 狂奔期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마쯔모도 선생은 전통양식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개성이 분명한 서예대가이다. 그 3년 뒤에는 곧장 마쯔모도 선생의 친구이자 간사이(關西)지방의 서예대가인 쯔지모도 시유 선생에게로 옮기게 된다. 이후 8년 간이나 글씨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선생의 歷代古典에 대한 수용능력은 대개 이 때부터 확보를 한 것으로 이해를 하게된다.
당연히 이 기간 동안에 선생은 일본의 여러 공모전(每日展, 全日本書道展 등)에 출품을 하고있었으며, 그로 인한 결과로는 다이또(台東)書道聯盟에서 상무이사를 지내면서 심사위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소암 선생은 나이 40이 되어서야 東京에 있는 다이쇼(大正)중학교에 근무하게 되고, 아울러 鹿潭書院을 개원하여 서예의 사회교육을 위하여 그 일선에 서게된다. 특히 鹿潭이라는 서원의 명칭에서도 살필 수 있듯이 고향 제주를 생각하는 것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이 때에 이미 일본서도원의 대의원을 역임하고 있었으며, 그 후 6년 간 在日居留民團 東京台東區의 부단장 겸 총무를 맡아서 현지 교민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일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암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광복이 된 10년 뒤인 선생의 나이 49세가 되던 1955년이었다.
소암 선생의 귀국은 실로 오랜만이었으며, 귀국 후엔 바로 교단에 서서 후진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펼쳤으니, 그에 관한 경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리된 소암 선생의 연표가 있으므로 그것을 기준으로 하고, 본고에서는 소암 선생의 붓글씨에 관한 것을 展開하기로 한다.
소암 선생은 글씨로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國展)에 출품한 것은 비교적 늦은 편이다. 그것은 소암 선생의 귀국 2년 뒤인 51세가 되던 제6회 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추천작가로 추천이 되어 본격적으로 국내무대에서 서예활동을 펼쳤으며, 국전 제12회 때는 드디어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위촉을 받게되니 1963년의 일이었다. 첫 출품을 한 지 6년만의 일이었으니, 이로써 소암 선생의 서예실력이 어는 정도였음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瀛州硏墨會의 발족은 소암 선생의 나이 59세(1965년) 때였고, 첫 개인전(1966년)은 제주가 아닌 목포에서였다. 그 다음 해에도 南農(許建)선생의 주선으로 같은 목포에서 전시회를 펼쳤으며, 그 다음해에는 광주에서 세 번째의 전시회를 펼치기도 했다.
그 다음해에 처음으로 제주에서 개인전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 때는 제주와 서귀포에서 연달아 초대되는 두 번의 개인전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문화시설의 열악성으로 인하여 두 번 모두 시내에 위치한 다방에서 전시회를 펼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때였다. 이 해에 제주도 문화상을 수상하시고 국전의 초대작가로 선정이 되었으니, 소암 선생의 나이 예순셋이 되는 해였다.
국전을 통해서는 도합 여섯 차례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셨는데, 그 때마다 심사위원의 자격으로서만이 아니라, 역량 있는 서예가로서 훌륭한 작품을 공개함으로써 후학들에게 글씨의 맛을 알게 하는 명작들을 만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소암 선생의 올곧은 성품은 국전의 바람직하지 못한 운영에 대한 거부의 뜻으로 국전이 막을 내리기 전해인 29회부터는 출품을 사양하게된다. 다른 쪽으로 대구소묵회, 광주소묵회를 발족시키고, 그것을 아우른 全素墨會 등의 지도에만 주력을 하시게 되는데, 이해관계가 없는 국제교류전 등에는 외면을 하지 않고 출품을 했다. 그러다가 1989년 당시에 서단의 개혁을 목표로 들고 뭉친 한국서예협회가 주최하는 제1회 공모전의 심사에 응하심으로써 국전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행동으로 확실히 밝혔으며, 그 심사의 현장에서 필자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후 8년이 지난 뒤 12월 3일에 소암 선생은 이승을 하직하셨으니, 평소 소암 선생께서 생각하시던 우리 식의 서예가 어떻게 변모를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 정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붓글씨 놀이
소암 선생의 글씨놀이에 대하여 한마디로 줄인다면 悠悠自適의 實體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좋은 글씨는 역시 유유자적에서 나오는 것일까, 평소에 술을 가까이 하신 탓인가 선생의 글씨에는 제한이 없다. 진실로 무제한이었지만 그 가운데 어느 한 곳이라도 법에 어긋남을 찾을 수가 없다. 어쨌든 그 모든 서사가 고리타분한 법에 매어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무턱대고 법을 외면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법이 있되 법이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법외의 법, 이러한 현상을 두고 우리는 소암 선생의 자유분방한 글씨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글씨놀이의 실체인 法外之法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암 선생의 글씨는 철저한 정통의 서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소암 선생의 글씨는 재주로 쓴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쓴 것이다. 대개의 서가들이 그러하지만 선생은 자신의 고유한 글씨를 강제하여 수용하도록 하는 주입식의 교육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선생의 글씨는 그야말로 천연덕스럽게 펼쳐내는 글씨놀이 그 자체일 뿐이다.
소암 선생의 서사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 '知之者는 不如好之者요, 好之者는 不如樂之者라(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겨하는 것만 못하니라).' 이는 공자의 말씀으로 論語雍也篇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 글을 읽어보노라면 선생의 생활철학이 어디에서 하는가를 필자의 좁은 소견이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공자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知者는 樂水하고 仁者는 樂山이니, 知者는 動하고 仁者는 靜하며, 知者는 樂하고 仁者는 壽니라.' 소암 선생의 生平이 이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야말로 산수를 즐겨 고요함은 분간하기 어려운 적막의 실체처럼 幽玄하고, 행실의 모범은 너무나 크고 넓어서 망망대해 그 이상의 것이 넘치고 있다. 그것을 선생께서는 글씨로 나타내시기도 하고, 또한 기회가 있다면 남에게 가르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으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望百의 입구에서 평생 글씨와 더불어 삶의 재미를 이처럼 주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하지만, 언행일치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암 선생은 그저 빙긋이 스스로의 행실에 조심을 하면서, 言行竝進을 하면서 생을 보내신 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 신선과도 같은 분이 쓰신 글씨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음인가. 소암 선생께서 고전의 공부흔적을 남기신 법첩의 임서 필적을 살펴보면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의 확실한 이해를 한 연후에 선생께서는 자신의 개성을 확보하신 것이다. 古典의 穿鑿은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작가 스스로의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선생의 書寫를 통해서 우리는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남의 足跡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자신의 흔적이 무엇인지도 분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선생께서는 평소 교육을 위한 자료를 많이 남겨놓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소암 선생의 글씨로 된 천자문 시리즈가 시판되고 있다. 거기에는 하나같이 소암 선생의 고전에 대한 이해력과 서사를 위한 필연적인 바탕인 정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마쯔모도(松本)선생의 지성적이고도 형상적인 재치에 의한 넘치는 멋과 함께 쯔지모도선생이 지닌 선비의 고아한 서예정신이 고르게 유되어 있는 소암 선생 그 자신의 새로운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소암 선생에게 영향을 끼친 두 日人 선생을 가르친 선생은 일본의 서예를 正統化한 쿠사까베 메이가꾸이다. 이조말기에 일공사로 일본에 부임한 양스우징으로부터 서예의 고전에 대하여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쿠사까베가 한 때 일본 서단을 휘저은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영향이 마쯔모도(松本)와 쯔지모도를 통하여 소암 선생의 서예세계의 근원적인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선생의 서사는 귀국을 한 후에는 師承關係를 떠난 소암 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부분적으로는 배움을 받은 선생의 영향이 전혀 없다할 수는 없겠지만 전체의 흐름에는 소암 식의 선생의 영향이 전혀 없다할 수는 없겠지만 전체의 흐름에는 소암 식의 대범하고 소박하며 그리고 끝없이 뻗어나가는 활달함으로만 감싸고 있다. 이러한 것이 소암 선생의 글씨가 지니고 있는 魔力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암 선생께서는 오로지 삶의 재미를 글씨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이해가 되고 있지만, 그렇게 보이는 배경에 대해서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여러 차례 있었던 선생의 긴 삶에 대한 짧은 문자의 나열은 그래서 더욱 어렵게만 생각된다.
어쨌든 소암 선생의 글씨 세계는 범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전체 작품에 깔려있다. 그것은 첫째 서사에 관하는 한 자유분방 그 자체이다. 앞서 설명을 했듯이 법이 있으면서도 법이 없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는 소암 선생의 기호인 술과 유관하리라는 부분도 짐작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한결같이 이러한 서사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고 하는 것은, 선생이 무장한 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서사정신과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라는 판단은 어렵지 않게 할 수가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두 번째 리듬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서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대해도 붓끝의 움직임이 신이 난다. 그것은 형상에 대한 제한을 스스로 제어함으로써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바람은 심지어 까다로운 楷書에서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화면의 장악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1970년에 서사한 4m×1.8m 크기 醉是僊에서 느끼는 맛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로 내 세울 수가 있는 작품이다. 아무리 큰 글씨라도 작은 손바닥에 올려다 놓을 수가 있도록 조율을 할 수가 있고, 아무리 작은 글씨라도 하늘을 뒤덮을 수 있는 기운이 이러한 작품을 통해서 이해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내용이라도 쉽게 소화를 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驅使하는 서체에 있어서는 별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당연히 즐겨 서사하는 서체가 있기 마련이지만, 모름지기 揮灑하는 서체에 대해서는 어떤 제약도 받는 경우가 없다. 더욱이 소암 선생은 귀국한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에는 隸書가 강했다. 그것은 일본에서의 연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느 짐작은 할 수가 있지만, 귀국 후에 소암 선생께서 보여주신 행·초서의 집중적인 전개는 당시 이 나라의 행·초서가 얼마나 취약했음인가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되기도 한다.

4. 마치며
한 인간의 역사는 그 자신만의 몫이다. 그 몫을 다하기 위해 인간은 부단히 생각하며, 행동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개인적인 삶의 몫들이 모여서 사회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름의 삶은 시대에 따라서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이 달아지게 마련이다.
소암 선생의 생활하시던 지난 세기는 질곡의 세기였다. 태어나신 지 3년만에 他意에 의해 조국이 없어지고, 철이 들고나서 시작한 공부, 이를 위해 선택한 기나긴 외국에서의 힘든 생활, 몇 번에 걸친 결혼, 그렇게 복잡한 가운데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가장으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예술인으로서 스스로의 몫을 소화해 냈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생활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환경은 소암 선생의 삶을 한 층 더 힘들게 한 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암 선생의 예술은 읽기가 어렵지 않다. 많은 이야기가 있음직 하지만 몇 자의 글씨로 대신하는 것은 그것으로 자신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운 바람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원고지 몇 장의 글을 가지고 그 분의 긴 藝術人生旅程을 소개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소암 선생의 술과 서예사랑 정신이 어디에서 발원하는 것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 분의 예술이 필연적으로 시대의 환경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도 함께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예술과 정신은 영원히 기려져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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