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레망소(1841~1929)는 프랑스 공화파의 개혁 정치가였다. 말년에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정치가 중에서 누가 최악이었느냐”는 질문 이었다.

그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최악의 정치가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세상에, 그렇다면 최악의 정치가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최선만 있었다는 뜻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기자에게 “저 사람이 최악이라고 하고 싶은 순간, 꼭 더 나쁜 정치가가 나타났다”고 했다.

유머이겠지만, 현실은 어떤가. 우리가 경험했던 바도 최선의 정치가는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최악이었다.

국회의원 선거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끌레망소의 일침(一針)을 인용하자면 14일에는 또 어떤 최악의 정치꾼이 태어날 것인가.

사실 19대 국회는 역대 최악이라 했다.

20대 총선 각 당 공천 역시 최악이었다.  선거운동 과정도 그렇다.

그렇다면 20대 국회는 최악의 DNA를 가지고 탄생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선거에 대한 일반의 시각은 이렇게 냉소적이고 비관적이다. 그래서 씁쓸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어쩌랴. 현행 정치제도 아래에선 선거(투표)를 통한 민의 표출이 그 나마의 대안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치나 선거에 대한 일반의 냉소나 혐오는 제도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제도 운영의 역기능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선거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빙자한 반민주적 행태나 권력 놀음에 대한 제어장치가 없는 것이어서 그렇다.

광기와 야만의 포퓰리즘이 휘몰아치는 선거운동 전장(戰場)에서 내뿜는 증오와 적개심이 정치나 선거의 본령을 짓밟아 버렸기 때문이다.

적개심과 동정심만큼 유권자에게 전파력이 강한 감정은 없다고 한다. 선거 홍보 전략가들 사이의 통설이다.

그러니 공약이나 정책·비전에 대한 합리적 논쟁은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막말 인신공격이나 본질을 외면한 상대방 깎아내리기가 그들에게는 고결한 선거 전략이요 신나는 득표요령이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선제공격의 성격이 짙다.

이 같은 인신공격이나 상대 끌어내리기는 그대로 되돌아 올수 있다. ‘부메랑 법칙’이다.

미국의 전기(傳記)작가 게일 쉬히는 그의 책 ‘남자의 인생지도’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파괴적 자기방어’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자기 방어를 한다는 것이 오히려 자기 파괴적이 되는 역설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현재 진행형인 총선 후보나 각 정당도 위기 탈출을 시도하다가 ‘파괴적 자기방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형국이다.

이런 소용돌이에서 당연히 정책 대결은 실종되어 버렸다.

황당한 허위공약 남발로 유권자들의 수준을 우롱하는 것이 고작이다.

지금 나라 사정은 ‘말씀’이 아니다. 정치 불신에다 경제 불안, 민생불만 등 소위 3불(不)현상에 신음하고 있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듯 폭발 직전의 예민한 상태다.

국민의 체감경기를 나타내는 고통지수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날로 상승하고 있다.

각종 경기 예고 지표들 역시 갈수록 악화 일로다.

그렇다면 국민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고, 지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각 정당이나 후보들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국민고통을 치유하고 3불(不)상황을 타개해야 할 정책비전을 제시하고 대안을 밝혀 국민적 지지를 받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실현성도 희박하고 신뢰성도 담보되지 못한 ‘황당 공약(空約)’을 쓸어 담아 유권자들의 표심을 희롱하고 있다.

구 소련 서기장 후르시쵸프는 “정치인은 똑 같다”고 했다.

시공간에 관계없이 정치가의 공약은 “강이 없는데도 다리를 놔주겠다”는 허황된 공약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 공약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있는 유권자 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신중한 선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선거란 최선의 후보를 뽑는 행사가 아니다. 최악의 후보를 골라내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유권자의 ‘깨어있는 힘’이 요구된다.

최악을 골라내는 ‘우매한 다수의 탁원한 선택’을 말함이다. 이른바 다양한 집단 공동체인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선택’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제임스 서로위키는 ‘전문가의 지식보다 대중의 지혜를 신뢰 한다’고 했다.

대중은 놀랄만큼 똑똑하며 평범한 다수가 탁월한 소수보다 현명하다는 주장이다.

우둔하고 부화뇌동하는 듯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결정을 내리는 ‘아둔함과 지혜’를 공유하는 것이 대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의 선거에서 ‘기막힌 선택’을 했던 유권자의 탁월하고 현명한 집단지성을 경험 한 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정치가 밉고 선거가 귀찮더라도 투표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투표포기는  집단지성의 지혜를 욕보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거를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상품을 고르는 쇼핑정도로 생각 할 수 있다면 그나마 투표행위가 약간 즐거워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갤 브레이스는 ‘정치가 가능성의 예술이 아니’라고 했다. “정치는 참혹스러운 것과 불쾌한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불쾌하지만 참혹한 최악의 상황을 피해보자는 차선의 선택이 정치라는 주장이다.

투표도 마찬가지다. 최악을 골라 던져버리고 차악을 선택하는 작업이다,

이번 투표는 최악의 정치인을 골라 떨어뜨리기 위해서도 기권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