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8일 전혀 모르는 여성 타카마쓰 사치코(高松 左千子.65)씨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카다케 노보루(岡竹 昇)의 딸입니다. 어제 아버지한테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참 안됐지만 아버지는 재작년(2014년) 11월 21일 돌아가셨습니다."
 
"연락을 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부터 사과 드립니다. (중략) 제가 아버지로부터 조금씩 배웠던 한글을 계속 배우기 위해 <대판부 고령자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다시하게 되었습다." 
 
"아버지가 <앞으로도 계속하라...>고 언제나 말씀하셨기에 어렵지만 노력하겠습니다. 한글 공부도 한국 음식도 (한국)사람들도 아주 좋아합니다."
 
"김길호씨로 받은 연하장도 아버지가 교재로 사용하여 가르쳐 주신 적도 있고, 앨범에서 사진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 90세 넘게 살았던 노인이 죽었으니까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기에 그 말에 따랐습니다."
 
"늦었지만 (아버지)생전에 베풀어 주신 후의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 받은 편지는 바로 (아버지) 불단(상)에 올렸습니다. 얼마나 기뻐하실런지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혹시 기회가 있으시면 꼭 저와도 한번 만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한글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를 받은 순간 불안했었지만 내용을 읽고 아무 예고 없이 뒤통수를 강하게 한대 맞은 기분이었고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암이었지만 병원에 입원하시지 않고 집에서 치료 받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저는 일본 사람인데 저도 배우러 와도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오히려 일본 사람이 대환영이입니다."
 
약 25년 전, 필자가 민단 이쿠노 북지부(현 중앙지부) 사무부장 당시 이곳에서 한국어강좌를 열고 가르치고 있을 때 오카다케 선생이 찾아오셨다.
 
60대로서 훤출한 키에 대나무처럼 곳곳한 자세, 속삭임과 같은 대화와 잔잔한 미소는 우리가 이미지 속에 그려보는 영국 신사처럼 강렬한 인상을 준 첫 만남이었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열렸던 한국어강좌에 나라(奈良)시에 사시면서 한번도 빠 적이 없었다. 강좌가 끝나서 가까운 이자카야(居酒屋)에 갈 때도 마시지는 못하지만 꼭 참석하셨다. 
 
일본 군대를 갖다 오고 다이마루(大丸)백화점 총무부장 역임 후 정년 되직 하셨다고 했다. 그후 한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여러 곳의 한국어강좌를 다니시다가 교통이 편리한 북지부에 오셨다.
 
당시 필자가 가르치는 한국어강좌는 한국어 실력에 관계 없이 같은 시간에 가르치니 초,중,상급 실력 수강자들에게는 꽤 불편한 강좌이기도 했었다.
 
"김 선생님. 제가 실력은 없지만 아,야,어,여의 기초를 배우는 초급 수강생들을 제가 가르쳐 보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수강생들도 좀 편할 것입니다." 
 
오카다케 선생의 한국어 실력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한국 여행도 혼자서 여기 저기 다니고 있었다.
 
관광 코스로 지정된 곳은 거의 돌아봐서 혼자 여행 때는 한국의 시골을 특히 좋아 해서 이동할 때도 택시는 이용하지 않고 언제나 노선 버스를 이용했다. 한국인들과의 만남의 여행이었다.
 
한국의 시골 여행을 혼자서 하시면 두렵거나 긴장되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면 오히려 시골 여행이 더 마음 놓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아주 즐겁다는 대답이 망설임 없이 바로 나왔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오카다케 선생님은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게 되실텐데 그게 걱정입니다."
 
"아닙니다. 걱정하실 필요 하나고 없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저에게는 공부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허락해 주시니 제가 기쁩니다."
 
그래서 약 5년간 계속 한국어 초급을 북지부 3층에서 가르쳤다. 그후 필자의 업무 확대와 오카다케 선생이 70대 중반의 나이로 매주 한국어강좌 때문에 나라시에서 오는 것이 어려워서 중지했다.
 
그 당시 민단 이쿠노 북지부에서는 1970년도에 일본 전국 민단 각 지부가 한국의 마을과 <새마을 자매결연>을 맺을 때 맺은 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보리를 방문하기로 결정했었다.
 
그 사전답사를 필자 혼자 가기로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안 오카다케 선생도 꼭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갔다 왔으며. 또 다른 때는 서로 다른 일정으로 서울에 가서 만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필자가 아는 사람이 한국에서 왔을 때에도 오카다케 선생은 자진해서 나라시를 안내해 주셨고 집에까지 초대해서 식사를 한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한국을 그렇게 좋아 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좋아 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하고 허허허 웃으시면서 "한국 사람들은 정이 있고 친절합니다."
 
이렇게 오카다케 선생님과 교류를 나누다가 고령으로 뜸해졌지만 매년 연하장의 주고 받음은 계속되다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13년 1월 22일었다.
 
나라시에 사시다가 고령으로 딸이 사는 곳으로 이사 와서 같이 살고 있다는데 한국 도래(渡來)문화가 산재해 있는 미나미카와치군(南河内郡)이었다.
 
이치쓰카고분군(一塚古墳群:渡来人古墳群). 치카쓰아스카박물관(近つ飛鳥博物館) 등이 있는 곳인데 집에서 가까우니까 찾와오면 안내하겠다고 하셨다.
 
꼭 간다고 했지만 그 약속을 했지만 필자가 연락도 드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사카한국상공회의소 주최로 지난 4월 23일 이곳의 탐방 기획이 있어서 필자가 참석했다.
 
오카다케 선생님의 집과 가까운 곳인데 여태 연락도 드리지 못해서 이번 기회에 갔다 왔다면서 죄송한 마음을 금치 못해서 편지를 드렸었다.
 
이에 대한 회답이 앞에 기술한 따님 타카마쓰 사치코(일본 여성인 경우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기 때문에 성이 바뀜)씨로 부터 왔었다.
 
편지를 받고 바로 전화를 해서 5월 2일 오카다케 선생님의 상을 모신 타카마쓰 댁을 방문했다. 상에는 코리아타운에서 사고 간 시루떡을 올리고 연락 드리지 못한 점을 빌면서 큰 절을 했다.
 
1년 재학의 고령자대학의 한글강좌에는 모두 48명의 수강생이 있고 매주 화요일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자신은 한국 여행의 담당자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도 몇 차례 한국 여행을 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부산으로 가서 4박 5일 동안 한국을 갔다 왔습니다. 참으로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약 한시간 반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귀가 길에 차로 역까지 바래다 주면서, 저는 언제나 차를 운전할 때는 이것을 듣습니다 하면서 들려준 카셋트는 한국어강좌 녹음이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어서 가슴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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