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오(희곡작가)

지난 회에 살펴본 하귀1리 바닷가의 수중고인돌처럼 반나절은 물속에서, 다시 반나절은 물 밖에서 풍파와 마주 선 신비한 돌탑들이 제주에 있다. 조천읍 신흥리 바닷가의 ‘큰개답’과 ‘오다리답’등 으로 불리는 다섯 기의 방사탑(防邪塔)들이 주인공이다. 이따금 썰물 때에 맞춰 신흥마을을 찾아 곱게 깔린 금모래 위를 총총거리며 탑 가까이 걸어갈 때면 항상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제주에 흔한 것이 방사탑인데 신흥마을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이런 수중 방사탑을 세웠을까? 당연하게도 그 답은 밀려오는 물결 골골마다 새겨진 제주가 거쳐 온 한 서린 신화와 역사 속에 숨겨져 있었다.

변방의 섬이기에 제주가 겪어온 격랑의 세월은 “저 하늘이 칠성판이고 저 바당이 명정포여” 라는 제주ᄌᆞᆷ수들의 노랫말에 온전히 배어있다. 목숨을 내걸어야하는 바다 밭일이야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고, 땅이라고 해봐야 돌밭에 거친 화산회토 일색인 곳이라 뭍의 농사나 마소를 치는 일도 바다 일 못지않은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다른 지방에서는 박토라며 거들떠 보지도 않을 묵정밭 정도만 되어도 제주에서라면 귀한 대접을 받는 문전옥답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생계를 꾸려나가는 노동만이 고난의 전부였다면 그나마 살만도 했으리라. 고려에 복속된 이래 탐학한 관리의 수탈은 조선이 망하는 날까지 족쇄처럼 제주백성들을 괴롭혔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이 제주목에 부임하는 것을 변방의 한직이라며 퍽이나 싫어했다는 말이 있다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제주목사 삼 년이면 한양 저자에 고랫등 같은 기와집 짓는다.”는 말도 심심찮게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정에 진상하는 갖은 공물의 수량을 부풀려 뒤로 빼돌리면 엄청난 정치자금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탐관오리들의 치부책에 먹물이 깊이 배일수록 제주백성들의 옷섶에도 피눈물이 깊이 배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시시때때로 해안가에 침몰하는 왜구들의 노략질은 짓뭉개진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이었다.

제주토박이들 중에서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눈물수건, 땀 든 의장’이라는 말을 종종 쓰곤 한다. 고된 삶과 한 맺힌 죽음은 눈물 마를 날이 한 시도 없게 했고, 쉴 새 없는 노동은 흥건한 땀이 밴 갈정뱅이(갈옷잠방이)에 소금꽃을 피워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만날 신흥리 방사탑과 볼레낭당의 박씨일월은 한 맺힌 죽음이 서린 역사와 신화가 공존하는 성역의 주인공이다.

조천읍 신흥리 볼레낭당

조천읍 신흥리의 볼레낭당의 '볼레낭할망'은 본래 이 마을에 살았던 박씨 집안의 꽃다운 처녀였다. 불과 백 년 남짓한 과거인 19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처녀 박씨는 여느 날처럼 바다 물질을 나갔다 겁탈하러 달려드는 일본인 선원을 피해 달아나다가 보리수나무 덤불 아래서 주검이 되었다. 한 맺힌 박씨 처녀의 원혼을 안타깝게 여긴 일가와 마을주민들이 당을 설연하고 모시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신흥마을에서는 지금도 초정월에 ᄌᆞᆷ수굿을 치를 때는 물론 평상시에도 볼레낭당에는 남자들의 그림자조차도 얼씬하지 못하게 엄히 출입을 금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금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동네남정네들이 이 당 앞을 지날 때는 쳐다봐서도 안 되고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 에둘러 지나가야 한다. 당굿을 할 때에는 지금까지도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아예 참가할 수 없다. 이 당에 함께 모시고 있는 하르방은 본래 신흥리의 본향당인 '대방황수당'의 신이다. 이 하르방당은 거리굿를 지내던 당인데, 4.3 이후 이 당에 같이 모시게 되었다. 거리굿이란 거릿제, 거리도청제 등으로 불리는데 본향당굿을 할 때면 당기를 모시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도액막이를 하고, 집집마다 방문해 액막이를 하는 굿의 한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조천읍 신흥리의 수중 방사탑1

신흥마을은 해안선이 마을 안쪽을 향해 반달모양으로 깊숙하게 휘어진 곳이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배가 마을 가까이 오기 편해 왜구들의 노략질이 잦았다고 한다. 관군이 신흥마을에 들어왔을 때면 기동이 빠른 왜구들은 이미 노략질을 끝내고 나 잡아 보란 듯이 낄낄거리며 바다로 꽁무니를 뺀 뒤라 말 그대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

잦은 왜구의 출몰, 그때마다 번번이 놓치는 관군, 마을사람들은 더는 앉은 채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여겼는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했다. 길어야 백 년 전이라지만 지금과 달리 신화적 세계관이 여전히 유효했던 시대였기에 신흥마을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마을 북쪽 바다에 방사탑을 쌓는 것이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때가 무술년인 1898년 1월이었다고 한다. 왜구를 방비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거니와 기상재해로 인해 일어나는 해상의 피해나 마을의 액살(厄煞)까지 한꺼번에 두루두루 막을 요량이었다. 그리하여 자루처럼 안으로 굽이진 바닷가에 다섯 기의 탑을 세워 암탑과 수탑을 구분하고 하나하나 이름까지 붙여놓았다. 그 뒤로 박씨 처녀의 원령(怨靈)을 모신 볼레낭당과 함께 다섯 기의 방사탑은 신흥마을 바닷가의 든든한 지킴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을의 지킴이가 된 탑들은 세월의 풍파를 용케도 버텨내는 듯했다. 하지만 공든 탑은 무너지는 일이 없다는 속담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1950년대에 세 기가 무너지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다시 마을에 궂은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치를 떨게 했던 왜구가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시대였다. 신화적 세계관 또한 과학을 신봉하는 가치관에 떠밀려 방사탑처럼 무너지고 만 뒤라 사람들은 다시 세우려들지 않았다.

그렇게 두 기만 남아 위태로이 마을을 지키던 세월이 다시 오십 여 년이나 흐른 2006년에 이르러 마을에 해안도로를 만들게 되자 동티를 막을 생각으로 무너진 세 기의 탑을 복원한 것이 최근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볼레낭할망’이란 이름을 얻고 당신(堂神)이 된 박씨 처녀와 같은 사연은 없지만 제주의 여느 마을이라도 방사탑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애월읍 수산리의 경우에는 방사탑을 비롯해 인공연못의 일종인 물통까지 만들어 액막이를 했다고 한다. 수산리 본동에서는 화재예방을 위해 ‘오방수’라고 부르는 다섯 군데의 물통을 만들었다. 수산리에 속한 마을 중 하나인 예원동의 경우에는 마을의 다섯 방위에 ‘오방석’을 만들어 세웠다고 전한다. 먼저 동쪽에는 새 모양의 형상석이 있었고, 서쪽에는 동주석, 즉 사람 모양의 돌을 세웠다고 한다. 남쪽에는 ‘불새’라고 부르는 새 모양의 형상석, 북쪽에는 개 모양의 방사석을 세운 뒤 그 주위로 이중의 성담을 둘렀다고 전한다. 마지막으로 중앙에는 염소 또는 양 모양의 ‘방사석’을 세운 뒤 등에 글씨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본동의 오방수처럼 화재예방을 위해 동, 서, 남쪽에 물통을 파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메워지고 없다고 한다.

조천읍 신흥리의 수중방사탑2

이처럼 제주의 방사탑은 여러 가지 이름을 지닌 것처럼 생긴 모양도 목적에 따라 동네마다 각양각색인 모습을 하고 액살(厄煞)을 막는 지킴이 노릇을 해왔다. 꼼꼼히 따져 말한다면 사실 액과 살은 성격이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액(厄)은 시간과 맞물려 침입하고, 살(殺)은 허한 공간으로 침입한다고 여기는 것이 전통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의 방사탑은 액과 살을 뭉뚱그려 방비하는 시간과 공간의 지킴이다. 이미 말했던 대로 제주토박이들이 겪어야했던 이삼중의 고초 때문에 액이든 살이든 삿된 것이라면 모조리 막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이 방사탑을 이룬 돌멩이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것이다.

4.3평화공원의 백비(白碑)

돌에 새겨진 제주토박이들의 염원은 오래된 전설과 신화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한국근현대사의 참극 중 하나인 제주 4·3을 추념하는 4·3평화공원 기념관에는 광개토대왕비만큼이나 큰 비(碑)가 세워지지 못한 채로 누워 있다. 눕혀져 있을뿐더러 글자 하나 문양 하나도 없는데 이 바위를 비(碑)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연도 새겨지지 않아 ‘백비(白碑)’라고 불리는 이 바위 앞의 해설문을 읽고 나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표선면 가시리 본향 구석물당 본향대제에서 백소지를 올리는 장면

백비는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주의 굿에서는 사연이 있어 굿을 청한 본주가 백지를 접어 불사르는 ‘소지(燒紙) 사름’이란 과정이 있다. 이때 접는 종이를 ‘백소지권장’이라고 한다. 백소지권장이라는 말을 두고 옛 어른들 대부분이 문자속이 없어서 바라는 바를 쓰지 못해 백소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풀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바라고 바라는 사연이 너무 많아 작은 종이 한 장에는 모두 써놓기가 부족해서 백소지로 올리게 되었다는 해석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백비와 백소지권장은 이와 같은 이유로 쓰이지 못한 사연을 담고 있다. 4·3의 아픔을 담은 백비와 볼레낭할망, 그리고 수중방사탑은 제주가 지닌 아픔을 새긴 신화적 사실주의의 산물이다. 백소지권장 또한 마찬가지다.

첨단과학의 시대라는 21세기 벽두에 우리는 신화에 열광한다. 우리가 넋을 잃고 빠져드는 신화를 현실을 초월한 판타지로만 보아서는 백소지권장에 담긴 신화적 사실주의를 가늠하지 못한다. 신화는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에서 간절히 이루고자 하는 사연을 담은 너무나도 뚜렷하고 현실적인 리얼리즘의 정수다. 신화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백비와 방사탑 또한 사실주의의 소산이다.

196~70년대 세계적인 ‘붐(Boom)문학’ 열풍을 이끌었던 남미대륙 환상문학의 선구자인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자신의 고향 ‘마꼰도’를 배경으로 식민주의의 수탈과 콜롬비아의 내전을 고발했다. 비가 그치지 않는 마을 마꼰도,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아이가 보여주는 환상적인 현실이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와 함께 한다. 남미의 신화와 전설을 통해 현실의 참혹함을 토설한 마르케스는 ‘신화적 사실주의’라는 말을 남겼다.

온갖 모험과 환상적인 체험의 연속인 제주의 수많은 본풀이와 바다 속에 반쯤 잠겨 신비감을 뿜어내는 신흥마을 방사탑은 현실을 초월한 판타지가 아니다. ‘눈물수건 땀 든 의장’에 스민 신화적 사실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니 부디 신화를 읽되 드러나는 줄거리와 주인공의 매력에만 빠지지 말고, 그 이야기의 그늘 속에 숨겨진 현실의 아픔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제주토박이들의 열망과 의지를 함께 읽기로 하자.

 

*참고자료

고광민, 제주의 돌문화, 제주돌문화공원

제주도, 제주도지

박병규, 마술적 사실주의 : 문화적 자의식과 문학적 지형도,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라틴아메리카연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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