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오(희곡작가)

“누구야 누가 또 생각 없이 돌을 던지느냐~.” 사무치는 상처를 담고 흐르는 애수 섞인 노랫말이 아니다. 저항이라고 해서 80년대 대학가의 매캐한 최루연기 속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짱돌을 이르는 것도 아니다. 새까만 먹돌이든 새빨간 속돌이든 제주의 돌엔 바람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래서 제주의 돌은 생겨먹은 그 자체가 저항과 상처의 숙명을 품고 있다.

제주의 현무암은 어떤 이유로 깊은 상처를 지닌 채 태어났을까? 박박 얽은 곰보자국을 남기고 사라지는 천연두의 신 ‘호구대별상서신국마누라’가 사람들의 얼굴뿐만 아니라 지천에 뒹구는 돌멩이의 피부에도 상처를 남겼다면 믿겠는가? 이름이 너무 길어 간단히 ‘마누라’라고 불리는 역신(疫神)과의 전쟁 이야기 속으로 함께 뛰어들어 가보자.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마마신인 마누라는 봄부터 가을까지 제주섬으로 찾아들곤 했다. 제주사람들은 천연두가 두려워 마누라가 찾아오면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 그럼에도 푸대접이라며 마마를 퍼뜨리는 마누라의 기승에 지친 제주사람들은 굴속으로도 숨어보고, 성담을 쌓아 막아내려고도 했지만 어떤 노력도 물거품처럼 꺼지고 말았다.

고심하던 사람들은 동해용궁의 산호수가 마누라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 용궁이 사람의 몸으로 갈 수 있는 곳이었겠는가.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며 전전긍긍하는 사이 애기ᄌᆞᆷ수바당에서 물질을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 ᄌᆞᆷ수 하나가 남몰래 바다로 뛰어들어 무작정 헤엄쳐 나간다. 어린 ᄌᆞᆷ수는 한참을 바다 속을 누볐으나 좀체 용궁을 찾지 못해 바위신령에게 기도해 마침내 용궁에 다다른다.

어린 ᄌᆞᆷ수는 동해용왕께 산호수를 내어달라고 빌었지만 용왕은 산호수는 용궁의 보물이라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 거절한다. 그러나 손이 발이 되게 끊임없이 애원하는 어린 ᄌᆞᆷ수를 매정하게 돌려보낼 수 없어 산호수 대신 대규모의 군사를 내어준다.

제주섬에 상륙한 용왕의 군사들은 바위신령의 군사와 합세해 마마신의 군사들과 큰 싸움을 벌인다. 제주섬 전체를 시산과 혈해로 탈바꿈시킬 정도의 엄청난 전투는 마누라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용왕의 군사들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고, 바위신령의 군사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섬 곳곳에 나뒹굴게 되었다. 마누라 군사들의 칼날과 화살에 상한 몸이 식어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 되고만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잃게 된 제주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흐느끼는 순간 용궁에서 뭍으로 헤엄쳐 돌아오다 숨이 차올라 죽은 어린 ᄌᆞᆷ수의 시신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그제야 ᄌᆞᆷ수의 희생을 알고 시신을 수습하려고 한다. 그들이 ᄌᆞᆷ수의 시신에 손을 대려는 순간 오색광채가 연기처럼 선연하게 피어오르더니 싸늘한 주검이 용궁의 산호수로 변신한다. 마누라를 물리칠 무기가 이렇게 탄생했고, 마침내 제주사람들은 마누라를 퇴치하기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 ‘산호해녀’라는 이름의 전설로 채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지천에 뒹구는 제주의 현무암이 지닌 상처의 연유뿐만 아니라 제주ᄌᆞᆷ수의 숭고한 희생까지 되새기게 만든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가 제주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것인 줄 금방 알아챌 것이다. 현무암의 바위신령과 어린 ᄌᆞᆷ수는 제주의 토착민이다. 마누라의 군단은 당연히 외세라고 할 수 있다. 유사 이래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온 제주의 뒤안길은 이들의 대결을 통해 전설의 서사로 재탄생했다. 그렇다면 용왕과 그의 군사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제주사람들의 입장에선 이 또한 외세의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외세와의 전쟁을 또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극복하려다 낭패를 맛본 사례를 종종 보아왔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하러 와서는 뒷전에서 왜군과 비밀협상을 벌였던 명군이나, 삼국통일전쟁 당시 신라를 돕는다며 소리만 요란한 행군을 펼쳤던 그 유명한 ‘당나라군대’만 해도 또 다른 외세일 뿐이었다. ‘산호해녀’ 전설은 마누라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산호수가 용궁의 보물이 아니라, 물질을 갓 배운 어린 소녀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제주인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침략이건 지원이건 외세를 거부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제주토박이들의 자주정신이 이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접할 때면 자연스레 황석영의 소설 ‘손님’이 겹쳐진다. ‘마누라’의 다른 이름이 ‘손님’이란 점에서 이미 외세를 뜻한다. 소설 속의 참극만 보더라도 소련도, 미국도, 외래의 이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산호해녀’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부를만하겠다.

제주역사 속 저항의 상처가 남은 돌의 이야기는 신통방통한 중국의 술사(術士)로 알려진 ‘고종달 설화’에도 여러 형태로 등장한다. 실존인물이었던 호종단(胡宗旦)을 모델로 삼은 이 이야기는 제주를 대표하는 풍수설화다.

먼저 역사 속의 실존인물인 호종단의 면모를 살펴보자. 송나라 복주(福州) 출신인 그는 고려 예종 때 귀화하여 15여 년 동안 관리 생활을 하였다. 송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에 들어가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그가 고려로 귀화한 배경에는 비좁은 출사의 관문 때문이었다. 출사의 꿈을 포기한 호종단의 시선은 바다 건너 고려를 향했다. 당시 고려는 송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각종 제도와 규율을 정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국에서 출사하지 못한 송나라 선비 여럿이 귀화해 고관대작의 지위까지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당시 대표적인 귀화인물로는 유재와 신안지가 있다.

당시 고려임금이었던 예종은 즉위 이후 각 지방에 감무(監務)를 파견하고, 교육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청연각과 보문각을 설치하는 등 여러 개혁정치를 통한 왕권강화에 주력하였다. 고려의 사정이 이러한바 송나라의 엘리트 출신인 호종단은 예종의 총애는 물론 선배 귀화인인 유산지의 지원까지 받으며 조정에 진출한다. 그리하여 호종단은 마침내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벼슬까지 오르며 송나라에서 못 이룬 꿈을 고려에서 이루게 된다.

고려 조정의 중역으로 입지를 굳힌 호종단의 행적은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책에 실려 있다. 비록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호종단이 제주에 다녀갔다는 이야기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호종단이 이 땅을 진무[鎭撫]하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진무’라는 표현에서 풍수지리에 따른 단혈(斷穴) 행각이 엿보인다.

도대체 호종단은 어떤 능력을 지녔기에 제주섬을 진무할 수 있었을까? 그는 송나라 태학 출신의 유학자라는 경력 말고도 도교의 압승술사(壓勝術師)라는 남다른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염승술(厭勝術)로도 불리는 압승술은 지형이나 산세를 인공적으로 조정하는 비보풍수(裨補風水)와 더불어 주문이나 주술로 사람을 저주하는 희한한 술법을 가리킨다. 더욱이 고려임금 예종은 도교에도 유다른 관심을 지니고 있어서 이미 유원충이란 술사에게 동계(東界-오늘날의 함경도 일대)의 산천을 순시하는 임무를 맡긴 바 있었다. 이런 임금이었으니 호종단에게도 전국을 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전국을 누비던 호종단이 유유히 바다를 건너 탐라로 진입하던 모습을 떠올려보자. 당시 탐라는 숙종10년(1105년)에 탐라군으로 복속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 고려와는 사뭇 다른 문화는 물론 독립적 지향이 강한 곳이었다. 즉위 초부터 각처에 감무를 파견하며 통치 질서를 정비하던 예종은 탐라를 완전한 군현으로 만들기 위해 호종단을 보냈을 것이다.

자신의 장기인 압승술을 앞세운 제주의 각처를 돌며 제도와 문물을 고려식으로 정비하고, 비보풍수를 단행했던 호종단, 그로서는 고려 조정에 대한 충성이었을지 몰라도 당시 탐라의 백성들에겐 공포와 원망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제주가 천자(天子)가 태어날 지세를 지녀 중국황제의 명령을 받은 고종달이 섬의 산혈과 물혈을 모두 떠버렸다는 전설이 생겨난 듯하다.

고종달이라는 제주식 토명(土名)으로 변신한 그의 행적을 다룬 전설이 매우 많은데 ‘꼬부랑낭 아래 행기물’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표선면 토산리의 ‘거슨새미’와 ‘노단새미’, 서귀포시 서홍동의 ‘지장새미’ 등의 샘의 수신(水神)을 주인공으로 하는 고종달의 단혈 실패담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에게 먹을 것을 내어준 감목관 김만일 일가와 관련된 ‘반디기왓’ 일화처럼 보은의 이야기로도 나타난다.

안덕면 사계리의 용머리

그의 풍수설화 중에서 돌과 관련된 이야기는 안덕면 사계리의 ‘용머리’와 한경면 고산리 차귀도 ‘매바위’의 사연이 가장 유명하다. 두 이야기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닌다. 먼저 용머리의 사연은 이렇다. 제주의 명혈을 표시한 지리서를 들고 곳곳을 활보하며 정기를 끊던 고종달이 산방산에 이르러 바다 쪽을 내려다본다. 그의 눈에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용을 닮은 용머리가 포착된다. 왕후지지임을 직감한 호종단은 한달음에 용머리에 오른 뒤 혈맥을 찾아 사정없이 칼을 내리친다. 그의 칼날에 깊숙이 베인 용머리 바위에서 피가 솟구쳤고, 끝끝내 용의 정기가 소멸되었다고 한다.

한경면 고산리 차귀도의 매바위

차귀도 매바위는 용머리와 전혀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제주의 단혈을 마친 고종달이 유유히 돌아가기 위해 차귀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라산의 호국신인 광양당신이 매로 변신해 그의 돛대 위로 날아드니 갑자기 폭풍이 일어 고종달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로 인해 매바위가 있는 섬이 고종달이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뜻을 지닌 차귀(遮歸-돌아가지 못해 막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마치 제주섬으로 화한 여신 설문대처럼 산호수로 변신해 제주를 구한 사체화생(死體化生)의 주인공 애기ᄌᆞᆷ수와 제주의 현무암, 설문대의 육신인 제주를 난도질한 고종달에게 원한 맺힌 복수를 감행한 차귀도 매바위, 제주의 돌에는 불굴의 저항정신이 숭숭 뚫린 구멍마다 빼곡하게 들어차있다.

 

*참고자료

이바른, 고려 예종~인종대 宋人 胡宗旦의 정치적 성격, 전남대학교 석사논문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제주설화집성

진성기, 남국의 전설, 일지사

현길언, 고종달 ( 고宗旦 ) 型 說話 에 나타난 濟州民 의 意識構造, 한국문화인류학9, 한국문화인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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