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 변시지 화백

[1926년 서귀포시 서홍동에서 태어나 2013년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난 우성(宇城) 변시지는 제주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청년시절을 지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서울에서 활동을 하다가 지난 1975년 고향에 정착하고 오랫동안 가장 제주적인 정서를 작품에 담아왔다. 2016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주년이 되는 해다. 제주투데이는 ‘[문화기획] 왜 변시지인가?’를 통해 다시 한 번 宇城 변시지 화백의 예술혼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황인선(문화마케팅 평론가)

몇 년 전에 제주도에 이민을 간 지인을 통해 한 화가의 이름을 들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그림을 보았다. 순간 충격을 받았다. ‘억, 이런 화가가!’ 그러나 그걸로 그뿐, 나는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서귀포 서홍동 기당 미술관에서 제대로 화가의 그림을 보았다. 폭풍, 쓰러질 것 같은 소나무, 한 남자, 외로운 배, 여윈 말, 황토빛 하늘과 바다, 양파뿌리 같은 태양... 그리고 다리가 하나인 까마귀. 다시 충격을 받았다.

 

폭풍의 화가, 가슴에 칼을 품은 화가

서울로 돌아와 페북에도 올리고 기고도 하고 사람들에게 그의 그림을 보여도 주었다. 반응은 비슷했다. 이미 화가의 그림을 기억 하고 있는 지인도 의외로 꽤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모여졌다. 변시지 화가 그림에서 흔들리는 삶 속의 나를 보았다는 것과 독특하면서도 뭔가 같이 비춰지는 그림들이 있다는 것. 비춰지는 그 그림들이 뭐냐고 묻자 그들은 김정희 ‘세한도’와 고흐나 고갱 같은 후기 표현주의 인상파를 말했다. 그런가!

사실 나도 그랬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1844년 59세의 나이로 제주로 유배를 왔을 때 중인 이상적이 한난(寒亂)에 처한 자신임에도 의리를 버리지 않음에 마음이 움직여 그려준 그림이다. 고갱이나 고흐는 당대 프랑스 화단에서 독특한 시도와 삶으로 외롭게 살았었다. 그들은 자연을 그리되 심경(心景. Mindscape) 즉, 마음속의 풍경을 그린 화가들이다. 변시지 그림도 그랬다. <폭풍>, <생존>, <이어도>, <기다림>,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등을 보면 제주도를 표현하였으나 그 제주도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자연 풍경은 아니다. 그래서 폭풍을 그리지만 황토빛 폭풍이고 배를 그리되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신화의 섬 이어도의 배이고 산을 그리되 여신의 배이고 까마귀를 그리되 그것은 다리가 하나인 외족오이다. 외족오는 고대의 삼족오 같은 신화적 까마귀가 아니라 군중 속에서 홀로 고독한 삶을 선택한 현대인의 표상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변시지는 제주도를 그렸으되 제주도를 넘어서 현대를 향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현대를 사는 우리를 여전히 흔들고 후벼 파고 있다. 그의 폭풍은 자연의 폭풍이 아니라 우리 삶, 현대인을 둘러싼 잔인한 세계성의 폭풍인 것이다.

나는 미술 평론가가 아니다. 문화마케팅 평론가다. 문화 마케팅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변화를 본다. 그 세상은 자본주의의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역동적이기도 하지만 때로 잔인하게 소외된 자의 삶을 흔들어 놓는다.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들은 헐벗은 상태로 자본주의의 폭풍 앞에 자신을 드러낸 수밖에 없다. 변시지의 그림에 나오는 외로운 남자, 지팡이, 외로운 배와 까마귀 등이 그런 개인을 표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뿐인가? 실뿌리 같이 세상에 가녀린 햇살을 뿌리는 누런 태양은 구원이 가능성이 그만큼 강하지 않음을 표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변시지의 강한 먹선 그림은 그가 결코 굴하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는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도 굵은 먹선의 칼처럼 대결하려고 한다. 말년의 그의 그림은 황토도 버린다. 오로지 굵은 먹선으로 간결하게 세상의 핵심을 표현한다. 오연하게 앉아 오염된 명리의 세상에 사군자 먹선을 치던 문인들 그림처럼 동양의 풍토 그림 기원(Origin)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결코 허약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흔들리며 사는 나 같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칼의 위안을 얻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오마주 To 폭풍의 세상 사람들

나는 그의 그림을 서울 광화문에 있는 문화 창조 벤처단지 1층에 걸자고 했다. 문화 창조 벤처 단지에 입주한 100여명 기업가들은 그야말로 폭풍의 한 가운데를 걸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벤처라는 말 자체가 모험이고 모험은 곧 폭풍을 맞는 것이다. 그들의 미래는 코발트블루가 아니고 황토빛일 것이며 그들의 배는 크루즈가 아닌 쪽배일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이 폭풍이 되어 그를 쓰러트릴 듯 불어도 그는 끝내 칼을 꺼내어 폭풍을 베며 가야 한다. 그러니 폭풍의 화가 변시지 그림이 바로 그 건물 1층에 걸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제안이 더 확장된다면 세계 다른 나라 다른 위치에서도 폭풍을 견디고 살아가는 위대한 개인들에게도 그의 그림이 헌사(獻賜)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진다. 미국에 정의와 양심이 있음을 보여주는 폭풍의 후보 버니 샌더스 의원, 아프리카 정신의 횃불 만델라, 미얀마의 아웅 산 수지 여사 같은 그들 말이다. 폴 고갱의 그림이 타히티에 가둬져 있지 않듯이 변시지의 그림도 폭풍을 향해 선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되어야 함이 옳지 않을까. 변시지 그림에는 그의 청춘 시절에 영향을 미쳤던 유럽 인상파적 수용과 한국적 풍토에 대한 혹독한 성찰 끝에 얻어낸 자기만의 대결적 자세들이 녹아들어 있다. 변시지 스스로가 소논문 <예술과 풍토>에서 주창한 변시지 류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도 그의 그림 2점을 소장하고 야후 인터넷에서는 세계 100대 미술가로 변시지 그림을 꼽는 것일 것이다. 그만의 것을 만들어 세계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했으니까.

 

[다음주 토요일(7월 2일)에는 [문화기획②] 왜 지금 변시지인가? '폭풍 미술관, 폭풍의 타운 혹시 까치를 기억하는가, 새 말고 만화 영웅 캐릭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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