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오(희곡작가)

지상의 어느 곳에든 갈 수 있고, 어떤 곳에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람일 것이다. 해상의 물결조차도 바람과 하모니를 이루는 것을 보면 바람은 모든 곳에 머무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동서남북 사방팔방에서 자유롭게 넘나들고, 지세에 따라 산바람, 들바람, 강바람, 바닷바람으로 변신하는 바람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보이지 않지만 지구의 숨결처럼 모든 것을 매만지는 바람, 제주토박이들이 눈에 드러나는 바람을 상상해 ‘영등신’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지상의 모든 민족과 나라에서도 같은 생각이 싹을 틔워 수많은 바람신들이 생겨났다.

강요배 화백의 팽나무와 까마귀

이 나라가 역사의 첫 장을 펼쳐 터전을 닦은 신시(神市)의 높은 신들 중에도 바람신인 풍백(風伯)이 있었다. 풍사(風師)라고도 불리는 그는 새의 머리에 사슴의 몸, 뱀의 꼬리, 표범의 무늬를 지닌 비렴(飛廉)의 모습을 하고 천지를 떠돌며 바람을 일으켰다고 한다. 중국의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궁기(窮奇)’라는 북풍의 신이 등장하는데, 그 또한 풍백처럼 괴수의 모습이다. 때로는 날개 돋친 호랑이이거나 때로는 소의 몸에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돋친 괴수로 그려진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괴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람신 중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는 그리스신화 속의 ‘티폰’이다. 태풍을 이르는 말인 ‘타이푼’도 티폰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티폰은 본래 사람의 상반신과 뱀의 하반신을 지닌 존재였지만 100개나 되는 용의 머리에 날개까지 소유한 거대한 뱀으로 변신했다. 어마어마한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폭풍을 일으키는 그는 서양사람들이 매춘부의 상징으로 여겼던 에드키나와 인연을 맺었다. 에드키나 역시 사람의 상반신에 살모사의 하반신을 지닌 존재로 티폰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오르트로스와 눈이 맞아 스핑크스를 낳았는가 하면 영웅 헤라클레스와도 결합한 바람둥이다.

괴수와 반인반수를 뛰어넘어 사람의 모습을 갖춘 바람신들은 누구일까? 북유럽신화에서는 벼락망치를 휘두르는 천둥번개의 신 토르의 아버지이며 신들의 왕인 오딘이 바람을 일으키는 존재다. 오딘의 이름 속에 광란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일으키는 북극해의 칼바람이 얼마나 사나운 것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남아메리카 안데스 잉카문명의 최고신 비라코차 또한 폭풍을 일으키는 존재로 태양의 왕관을 쓰고 번개의 손으로 시간을 창조한다. 그가 흘리는 눈물이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니 비라코차는 비바람은 물론 기후현상 전체를 다루는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중동의 신화에는 바알, 아다드, 이쉬쿠르라는 바람신이 등장하고, 이집트에는 모래폭풍을 일으키는 세트가 있는가 하면, 일본의 코지키(古事記)에는 스사노오가 폭풍을 일으키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다시 우리나라 바람신의 사연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단군신화 속의 풍백은 기나긴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말 그대로 바람이 숨죽이듯 잦아들었다. 워낙 중국의 도교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신이기도 하거니와 왕이 집전하는 국가 차원의 의례에서나 섬기는 지배층의 신성인 탓에 민간에서는 이름난 신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백이 사라진 자리는 ‘영등신’의 것이 되었다. 영등이야말로 잦아들지 않는 바람처럼 피지배층이 섬기던 바람신이었다. 제주토박이들이라면 으레 ‘영등할망’을 떠올리게 되는 바람의 신 영등은 제주에서만 일렁이던 지역풍의 창조주가 아니라 우리나라 곳곳을 휘휘 감아 도는 광활한 영역의 신이다. 다른 지방에도 영등신앙이 널리 퍼져 있다는 말이다.

제주시 건입동 본향 칠머리당 영등굿 中 본향듦

“영등의 본초가 어딜러냐, 영등의 본향이 어딜러냐.” 바람맞이굿인 제주의 영등굿판에서 불리는 노랫말처럼 바람을 타고 영등의 자취를 둘러보는 여정은 함경도에서 제주섬에 이르는 조선팔도유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내력 또한 매우 깊어 옛 문헌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제주목 풍속조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2월 초하룻날 귀덕(歸德) 김녕(金寧) 등지에서는 나무 장대 열둘을 세워 신을 맞아 제사한다. 애월포(涯月浦)에 사는 자는 나무 등걸 형상이 말머리 같은 것을 구해서 채색 비단으로 꾸며 말이 뛰는 놀이를 하여 신을 즐겁게 하다가 보름날이 되면 그만두는데, 그것을 연등(燃燈)이라고 한다.”

이 기록은 제주에서 펼쳐진 영등굿을 개괄적으로 소개한 것인데, 영등을 일러 연등(燃燈)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조선시대 울산읍지인 ‘학성지(鶴城誌), 신광수의 ‘석북집(石北集)’, 이학규의 ‘낙하생집(洛下生集)’, 이옥의 ‘봉성문여(鳳城文餘)’, 윤정기의 ‘동환록(東環錄)’, 김석익의 ‘해상일사(海上逸史)’ 등 다른 기록에 나타나는 명칭 또한 매우 다양하다. ‘연등(然燈, 煙燈, 燃燈), 영등(迎燈, 靈登, 嶺登, 影等), 영동(靈童, 永同), 영등신(靈童神, 嶺登神), 영등제석(盈騰帝釋), 풍신(風神), 풍파(風婆)’ 등이 그것이다.

제주뿐만 아니라 여러 지방에서 영등신에 대한 의례와 내용이 발견되고 이름 또한 다양한 것으로 보아 영등신앙은 전국적인 것으로 보인다. 영등신을 기록한 표기가 이렇게 다양한 이유는 민간에서 쓰이는 신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발음을 빌린 음차(音借)를, 때로는 뜻을 빌린 훈차(訓借)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김석익이 해상일사에서 연등을 ‘煙燈’과 ‘燃燈’을 함께 사용한 것을 보면 확인이 가능하다.

제주시 건입동 본향 칠머리당 영등굿 中 영감놀이

학성지(鶴城誌)에는 영등신의 성격과 면모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영등신은 봄의 양기를 발산하는 신으로 바꾸어 말하면 풍신이다. 민간에서는 영등제석이라고 부른다. 이월 초하루가 되면 영등신이 인간세상을 사찰하러 내려온다. 이때 여염집에서는 목욕재계를 하고 상인의 출입을 금하며 손님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어 오늘날의 영등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자로 기록된 영등의 이야기가 아닌 쓰이지 않은 민간의 신화와 전설 속 영등은 어떤 모습일까? 영등신에 대한 관념은 멀리 태산준령의 함경도에서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제주를 제외한 다른 지방의 영등신앙을 살펴보면 경상도 지역이 가장 왕성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의 경우에는 충청북도와 인접한 지역에서 영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지만 의례나 풍속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사정은 충청도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월밥’이라고 해서 소나무가지를 부엌이나 장독대에 세워놓고 고사를 정도이다. 강원도의 경우는 백두대간을 경계 삼아 영동과 영서가 나뉘는 바 해안지역인 영동지역에서 ‘영동할머니’라고 부르며 집집마다 ‘바람 올리기’나 ‘영등제’를 지낸다고 한다. 전라도의 경우에는 경상도와 가까운 동부지역에서 영등신앙이 남아있는데, 강원도와 마찬가지로 ‘바람 올리기’ 등의 고사를 지내는 정도로 미약하다.

내륙지방 중에서 경상도의 영등신앙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제주도처럼 마을사람 전체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영등굿을 치르는 것은 아니지만 영등신에 대한 민담과 전설, 속신도 풍부하고, 개별적으로 지내는 의례도 ‘바람 올리기’, ‘요왕 먹이기’, ‘영등 모시기’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전해온다. 영등신의 면모나 하는 일도 제주와 비슷해서 함께 견주어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된다.

경상남도 통영 앞바다의 욕지도에서는 영등달을 정월 그믐날부터 2월 열아흐레까지라고 여기는데, 영등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과정과 다시 승천하는 과정이 바람으로 묘사된다. 먼저 정월 그믐날과 이월 초하룻날의 이틀을 “바람 내려온다.”, “풍신 내려온다.” 하여 영등신이 하늘에서 하강하는 날이라고 여긴다. 그 뒤로 며칠 간 사람들의 대접을 받은 뒤 하늘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등신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라는 점이다. ‘상칭, 중칭, 하칭’의 세 자매인 영등신은 차례로 승천하는데, 2월 아흐레에는 “큰손 올라간다.”, 열나흘에는 “중간손 올라간다.”, 열아흐레에는 “끄트머리손 올라간다.”고 한다.

경상남도 거창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는 영등신이 기간 차이를 두고 번갈아 하강하는 것에 대해 딸, 며느리, 아들, 손자 등 일가를 차례로 데리고 오기 때문이며, 돌아갈 때에도 패를 나눠 승천하기 때문에 영등달이 ‘상층, 중층, 하층’으로 구분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제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영등신앙은 미약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영등달이라 하여 영등신이 지상에 머무는 기간 동안 치르는 의례가 많은 곳도 있고, 그에 따른 금기와 속신이 풍부한 지역도 있다.

영등달의 금기와 속신은 전국적으로 대동소이하며 제주와도 비슷한 것이 많다. 전라도에서는 “제석달은 제석이 어른이라 조상이라도 물 못 얻어먹는다.”라고 하여 영등신 외의 다른 신에 대한 기원이나 고사를 치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영등신이 욕심이 많다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지어 어떤 지역은 영등달은 큰손님이 오시는 달이라 혼사도 치르지 않는 금기까지 있다. “이월에 장을 담그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여겨 장 담그는 일을 삼가는 것은 제주도의 금기와 거의 비슷하다. ‘이월동티’라고 해서 영등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신병(身病)이나 재앙이 생긴다고 여겨 지극정성으로 고사를 치르고, 몸가짐을 단속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영등신이 바람신인 탓에 날씨와 관련한 금기와 속신이 많은데, 이로 인해 ‘바람영등’, ‘비영등’, ‘물영등’, ‘불영등’ 등 영등신의 별명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등신이 지상에 강림하는 시간인 영등달을 둘러싼 의례와 금기, 속신이 풍부한 이유는 음력 2월이 봄이 오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계절의 순환을 놓고 보면 봄이야말로 실질적인 새해의 시작이 아니던가. 이 때문에 영등달에는 “부지깽이를 거꾸로 심어도 잎이 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목축, 농경, 어로를 생업으로 삼던 사회가 낳은 세시(歲時)와 더불어 그것을 관장하는 신을 숭배하던 옛사람들의 태도를 보며 오늘날의 바람을 생각하게 된다. 지구온난화며 엘리뇨, 라니냐 등 뜻조차 헤아리기 어려운 기상용어들이 일기예보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고 있다. 기상관측 사상 최고의 강풍, 최고의 폭염, 최고의 한파, 최고의 가뭄이 매일같이 세계신기록을 양산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파괴의 결과를 대자연은 슈퍼태풍고 쓰나미로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있다. 모든 것이 우리가 자초한 일이다. 과학의 진보, 경제의 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자연이 만든 시간을 거부하고 산업의 시간을 만들어낸 현대인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것을 잃고 말 것이다. 현실화된 멸망은 막지 못한다. 멸망의 시각을 늦출 수는 있다. 지금이라도 자연이 만든 시간을 받아들인다면.

다음 회에서는 이번 회에서 다루지 못한 제주의 영등신앙을 살펴볼 것이다.

 

*참고자료

남향, 영등할머니 신앙 연구, 한남대학교 석사논문

노사신 外, 신증동국여지승람

세르기우스 골로빈(이기숙 譯), 세계 신화 이야기, 까치

정재서, 산해경, 민음사

제주교육위원회, 탐라문헌집

현용준, 무속신화와 문헌신화, 집문당

제주도 무속과 그 주변,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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