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오(희곡작가)

지난겨울 전에 없던 북풍한설로 며칠 동안 제주가 마치 북유럽의 설국처럼 눈으로 뒤덮인 적이 있다. 눈이 드문 고장 제주에 몇 년 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으니 동장군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기가 바짝 죽었던지 제주의 어떤 신들도 함부로 어깃장을 들이댈 수 없었나보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이 사나흘 넘게 이어지자 문득 열두 가지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요술주머니가 내 손에 있었으면 하는 동심 어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법사처럼 날씨를 조절할 수만 있다면 이놈의 눈보라를 저 북극해 끄트머리로 돌려보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아쉽게도 내 손엔 요술주머니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이 자초한 환경파괴로 그 어느 시대보다 이상기후의 재난이 끊이지 않은 21세기, 요술주머니로 날씨를 조절하며 사람들을 살뜰히 보살펴주던 신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사라지고 이야기로만 남은 신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자.

서울 남산 ‘서소문 밖 백모래밭’에서 솟아났다는 여신이 있었다. ‘백줏또’라는 이름의 이 여신은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부모 눈 밖에 나서 용궁으로 쫓겨난다. 용궁에 살던 열두 명의 외삼촌에게 여러 가지 도술을 배우며 곱게 자라나 열다섯 살이 되자 요술주머니 열두 개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기에 이른다. 고향으로 오던 길에 여자라고 무시하는 삼천선비와 맞닥뜨리자 요술주머니로 안개와 비바람을 일으켜 혼쭐을 내고는 발길을 돌려 외할아버지 천잣또가 좌정한 제주로 들어와 구좌읍 세화리의 당신(堂神)이 된다.

한편 서울 남산 ‘아양동출 이나장’이란 곳에서 솟아난 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금상님’이었다. 천하명장의 운명을 타고 난 영웅인 그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적장의 목을 베더니 한 해마다 머리가 여럿 달린 적장을 하나씩 죽여 마침내는 머리가 열두 개나 되는 괴수를 퇴치해 대장군의 지위에 오른다. 그의 무시무시한 용력에 두려움을 느낀 임금은 금상님을 무쉐석함에 가둔 채 백 일 동안이나 불에 달구지만 상처 하나 없이 박차고 나와 바다를 향한다. 바다를 건너 제주섬에 다다른 금상님은 천상베필인 백줏또와 인연을 맺어 그 역시 세화리의 당신으로 좌정한다.

백줏또와 금상님의 사연을 보면 서로 닮은 점이 너무 많아 요즘 유행하는 평행이론이 떠오른다. 어쩌면 두 신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부부가 될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두 신의 사연 속에 담긴 데칼코마니를 감상해보자. 둘은 모두 서울 남산 어딘가에서 솟아났다. 부모가 있다면 금상님의 출생담에서 보이듯이 하늘이 아버지이고 땅이 어머니인 셈이다. 공교롭게도 두 신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운명적인 사건을 만나게 된다. 백줏또는 용궁으로 떠나게 되고, 금상님은 적장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열두 해가 지나는 동안 백줏또는 삼촌들로부터 요술주머니를 받으며 풍운조화의 도술을 배운다. 금상님은 머리 두 개 달린 장수부터 열두 개 달린 장수까지 차례로 퇴치하며 성장해 대장군이 된다. 풍운조화를 부리는 여신의 지위에 오른 백줏또는 고향으로 가던 길에 삼천선비를 꺾은 뒤 제주를 향한다. 금상님 역시 자신을 죽이려는 임금의 의지를 꺾은 뒤 제주로 들어온다.

두 부부신의 데칼코마니에 담긴 수수께끼를 모두 풀지 못하겠지만 그 중 몇 가지는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어느 정도 풀이된다. 먼저 그들이 제주로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벌인 일부터 살펴보자. 백줏또는 삼천선비를 꺾었고, 금상님은 임금을 혼쭐냈다. 표면상으로는 민중의 저항정신을 임금과 삼천선비에 대한 징치로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옳은 견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한 꺼풀 벗겨내고 이면으로 들어가 보자. 전근대사회의 지배계급은 시간의 주재자였다. 특히나 임금은 천기를 읽어 하늘의 시간을 인간으로 바꾸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 이야기 속의 삼천선비와 임금은 일 년 열두 달과 하루 24시간을 나누고 관리하는 권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백줏또와 금상님은 이들로부터 시간을 주재하는 권력을 빼앗은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열둘’이라는 숫자다. 백줏또는 신통방통한 요술주머니를 들고 하나하나에 담긴 도술을 배웠고, 금상님은 하나부터 열두 개까지 머리가 여럿 달린 장수의 목을 베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다름 아닌 열두 달을 의미한다. 더욱이 백줏또가 지닌 요술주머니에 담긴 권능은 일 년 열두 달의 계절변화와 24절기의 순행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백줏또와 금상님은 시간의 주재자이면서 계절과 기후의 변화를 조절하는 풍운뇌우의 권능을 신이라는 사실이 평행이론 같은 노정기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 가지 끝끝내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는 일곱 살에 담긴 숫자 7의 의미다. 제주의 신화 속의 영웅들은 곧잘 일곱 살 나이에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비일상적인 퀘스트를 만나게 된다. 왜 하필 7일까? 지금 다루고 있는 세화리본향당본풀이에 한정해서 시간과 기후의 조절자인 신성의 문제로 풀이한다면 일곱 살의 7 또한 시간을 의미한다고 조심스럽게 가늠할 수 있다. 고인돌의 왕국으로 세계에 알려진 우리나라, 우리나라에는 성혈(星穴)이 새겨진 고인돌이 수두룩하다. 마치 윷판처럼 보이는 성혈은 북두칠성이 네 번 반복해서 이어진 도상이라고 한다. 단지 북두칠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별자리 28숙을 뜻하기도 하고, 24절기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 말은 곧 고인돌의 성혈(星穴)이 일 년의 세시(歲時)를 기록한 달력이라는 사실을 이른다. 별자리의 순행을 시간과 절기를 가늠하는 역법(曆法)이 고인돌과 윷판에 담겨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조상들은 윷놀이를 달리 ‘윷경’ 또는 ‘척사점(擲柶占)’이라고 부르며 새해의 운세를 점치는 용도로 즐겼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심지어는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도 전투에 앞서 여러 차례 윷점의 일종인 주사위 점으로 전투의 승패를 점쳤던 사실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인돌의 성혈에 새겨진 7, 윷놀이의 말판에 그려진 7, 백줏또와 금상님의 일곱 살에 담긴 7은 일 년 24절기를 의미하는 수(數)에 담긴 신화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히 ‘기후조절’이라는 관점에서 세화리본향당본풀이에 접근할 때 풀이되는 견해일 뿐이다. 제주의 수많은 본풀이에 나타나는 7의 의미는 충분히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백줏또와 금상님처럼 시간과 기후를 조절하는 신들이 제주에는 너무나 많다. 허풍을 살짝 섞어 말한다면 제주의 신들은 모두 이와 같은 권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기후조절의 제신(諸神)들의 사연 중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가 있다. 제주시 용담동의 내왓당본풀이가 그것이다.

제주도의 큰 하천 중 하나인 한천(漢川)의 끝자락 용연 근처에 있었다는 내왓당은 조선시대 무속탄압이 극심하던 시절에도 함부로 없애지 못한 내력이 깊은 당(堂)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광양당(廣壤堂), 차귀사(遮歸祠), 천외사(川外祠), 초춘사(楚春祠)를 제주의 중요한 당(堂)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가운데 천외사(川外祠)가 내왓당이다.

오랫동안 유명세를 떨치던 내왓당이었지만 조선말에 이르러 끝내 폐당(廢堂)되고 말았는데, 이 당에는 열둘에 이르는 많은 신이 좌정했었다고 전한다. 지금까지 채록된 자료에는 열한 위의 신의 이름이 전하는데, ‘제석천왕마노라, 어모라원망님, 수랑상태자마노라, 천잣또마노라, 감찰지방관한집마노라, 상사대왕마노라, 중전대부인, 정절상군농, 본궁전마노라, 내외불도마노라, ᄌᆞ지홍이아기씨’ 등이다.

구좌읍 김녕리 궤네깃당

내왓당본풀이는 여러 이본(異本)이 전해오는데, 그 중 하나를 살펴보면 송당리본향당의 금백조와 소로소천국의 아들 중 하나인 천잣또마노라가 세 살 나던 해에 부모의 눈 밖에 나는 짓을 일삼자 무쉐석함에 가두고는 바다에 던져버리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천잣또는 다행이도 용궁에 다다랐고, 용왕의 사위가 되어 ‘ᄇᆞ름웃또’라는 벼슬을 받은 것도 모자라 ‘금봉도리체, 청푼체, 흑푼체’라는 바다를 가르고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요술부채를 선사 받아 제주시의 산지포로 들어와 내왓당의 당신(堂神)으로 좌정한다.

천잣또가 지닌 세 가지 부채는 세화리본향당본풀이의 백줏또가 지녔던 요술주머니와 비슷한 권능이 담긴 신의 상징물로 모두 용궁에서 받아온 물건이다. 용궁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신통한 물건들이 많은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생각인데, 한 가지 이유만 설명한다면 ‘바람과 바다의 함수관계’가 키워드이다. 세화리의 백줏또, 내왓당의 천잣또, 김녕리의 궤네깃또 등 수많은 신들이 동해용궁에서 받아온 보물들의 공통점은 기후를 조절하는 마법의 도구라는 점인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람이다. 바다를 생각해보라. 바다의 조류(潮流)는 달의 인력과 더불어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다. 바람과 파도의 흐름이 한 몸이나 진배없고 제주가 바다로 에워싸인 섬인 탓에 예나 지금이나 파도와 바람은 섬사람들의 생업을 좌지우지한다. 파도와 바람의 진원지인 용궁이야말로 제주섬토박이들로서는 신성한 보물이 무진장 넘쳐나는 초월적인 세계가 아니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깊이 있게 다루기로 한다.

제주시 용담동 내왓당 무신도 中 자지홍이아기씨

내왓당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은 열두 신위를 그림을 표현한 무신도(巫神圖)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다른 지방과 달리 제주도의 무속에서는 신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리는 전통이 거의 없다. 내왓당 무신도는 구좌읍 행원리 본향당의 무신도와 더불어 유이한 그림이다. 행원리 본향당의 무신도가 근래에 만들어진 것과 달리 내왓당 무신도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현재는 열 점이 남아있다. 전문적인 화공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은 다른 지방의 무신도와 달리 마치 고구려 고분벽화처럼 신비한 화풍을 자랑하며 각 그림마다 한자말로 신의 이름까지 적혀 있다. ‘제석위(帝釋位), 원망위(寃望位), 수령위(水靈位), 천자위(天子位), 감찰위(監察位), 상사위(相思位), 본궁위(本宮位), 중전위(中殿位), 상군위(相君位), 홍아위(紅兒位)’가 그 것이다. 이 중에서 천잣또에 해당되는 천자위와 그의 딸인 ᄌᆞ지홍이아기씨를 그린 홍아위를 살펴보자.

천자위는 조선시대의 그림답게 갓을 쓰고 홍철릭을 입은 양반의 모습이다. 그의 머리 뒤에서 꿈틀대는 것은 뱀이다. 허물을 벗는 뱀은 동서고금의 신화를 막론하고 영원불멸의 상징이다. 천자위의 영원성을 뱀으로 표현한 것이다. 천자위는 한 손에 왕홀(王笏)을 들고, 또 한 손은 불교의 그것처럼 수인(手印)을 맺고 있다. 왕홀은 제우스의 케라우노스, 토르의 묠니르, 인드라의 바즈라처럼 번개를 일으키는 마법의 도구이다. 수인 또한 풍운조화를 금방이라도 일으키려는 신의 위엄을 나타낸다.

ᄌᆞ지홍이아기씨의 홍아위는 또 어떤가.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삼단 같은 머리채에 꽂은 비녀에 새가 앉아 있다. 새는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이다. ᄌᆞ지홍이아기씨가 어디든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등 뒤의 칼은 아버지의 왕홀과 같다. 오른손의 부채는 당연히 아버지가 용궁에서 가져온 ‘금봉도리체, 청푼체, 흑푼체’ 중 하나인 마법부채일 게다. 그리고 역시 아버지처럼 수인을 맺고 있다.

제주시 용담동 내왓당 무신도 中 천잣또 마누라

내왓당 무신도는 이렇게 글이나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신의 내력을 한눈에 이해하게 해주는 대단한 경지의 신화미술품이다. 문자를 깨칠 수 없었던 옛사람들의 또 다른 기록신화가 이 그림에 도사리고 있다. 신의 권능을 제대로 맛보고 싶다면 제주대학교박물관으로 가시라. 그곳에 내왓당 무신도 열 점이 당신을 기다리며 마법의 수인을 맺고 있다.

*참고자료

강정식, 제주도 당신본풀이의 전승과 변이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박창범, 천문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현용준, 제주도무속자료사전 개정판, 각

------ 제주 신화의 수수께끼,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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