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시는 화가를 지망하는 소녀였다. 동료인 수와 함께 건물 3층에 공동화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존시는 폐결핵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환자였다.

창 너머 건너편 건물 벽의 담쟁이덩굴을 보며 ‘저 잎이 다 떨어지면 죽을 것’이라는 절망적 상황을 생각하는 신세였다.

“살고 싶다는 의지와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도 소용없었다.

‘떨어지는 담쟁이 잎과 함께 죽을 것’이라는 존시의 망상을 슬퍼하는 룸메이트인 수와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아래층 늙은 화가 베어먼의 질타도 아랑곳없었다.

세찬 비바람에 어느덧 담쟁이 잎은 다섯 개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마져도 하루가 지나자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언제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날따라 눈비바람이 거칠었다. 침대의 존시는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폭풍우의 밤이 지났다. 건너편 건물 벽에는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존시는 슬며시 눈을 떴다. 조마조마 창문너머 건너편 건물의 벽을 보았다.

“아, 세상에 이럴 수가”. 거기에는 아직도 담쟁이 한 잎이 벽에 붙어 있었다.

존시는 밤새 폭풍우를 이긴 담쟁이 한 잎의 기적에 벌떡 일어났다.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용솟음 쳤다. 존시의 건강이 나날이 회복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오 헨리 걸작 단편 ‘마지막 잎 새’의 줄거리다.

그 ‘마지막 잎 새’는 밤새 폭풍우와 싸우면서 늙은 화가 베어먼이 그려낸 것이었다.

베어먼은 결국 폐렴으로 쓰러졌고 숨을 거두었다.

듣도 보도 못한 아줌마 ‘최순실의 국정 권력 농단’에 온 나라가 들썩이고 온 국민이 절망하고 분노하는 최악 혼란의 시기에 왜 한가하게 ‘마지막 잎 새’ 타령인가.

죽음을 마다않고 사랑을 실천한 한 늙은 무명 화가의 숭고한 작업은 절망적 상황을 희망으로 돌려놓았다.

절망적 국가 현실을 희망으로 바꾸어야 하고 바꿀 수 있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차용해 본 이야기다.

비유하건데, ‘마지막 잎 새’에 등장하는 환자 존시는 표류하는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절망적 상황에 치를 떠는 국민이다.

언제 죽을지 몰라 담쟁이덩굴에 의지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존시의 신세처럼 처량하다.

그렇다면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늙은 화가 베어먼의 역할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몫이다.

국정혼란의 원인 제공자가 대통령이고 사적 인연을 치마폭에 감싸 “오냐, 오냐”하며 호가호위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국정농단의 몸통이 대통령인 셈이다. 그 몸통에 빌붙어 진드기처럼 피를 빨아먹는 졸개(수하)들을 잘못 거느렸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러한 원인 제공과 사적 연줄에 의한 국정농단이 나라를 병들게 했고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나라 현실은 절망적이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치마폭 권력놀음에 치가 떨린다. 속을 온통 게워내도 쓰디 쓴 담즙처럼 속이 쓰리고 구역질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기에 대통령의 책임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통절하게 반성하고 병든 나라, 아픈 백성을 살리기 위해 늙은 화가 베어먼처럼 목숨을 던져 ‘마지막 잎 새’를 그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절망의 벽에 매달려 국민에게 희망의 ‘마지막 잎 새‘를 그려내는 일이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성적 접근이나 ‘경계의 담장을 낮추었다’는 식의 문학적 수사(修辭)의 찔끔 사과로 국면을 넘기려 해서는 곤란하다.

대통령은 “책임을 통감하고 특검까지 수용 하겠다”고 하였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발가벗을 수도 있다’는 각오인 셈이다.

그렇다면 검찰 수사나 특검은 물론 국정조사든 청문회 등도 마다할 일이 아니다.

대통령과 검찰에 대한 극도의 불신시대에 각종 의혹을 생산하는 음모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그렇다.

국정혼란과 사회혼란 등 총체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2선 후퇴’도 옵션에 올려놔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국가 안보와 외교 등 외치에 전념하고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수준으로, 총리에게 내치의 권한을 보장하는 혁명적 발상의 전환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하야’ 등 국정중단이나 국정공백을 부를 초법적 상황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 할 때가 아니다. 시간이 없다.

대통령의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대통령은 청와대의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 나와야 한다.

정상적 국가 경영을 위해서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낮은 자세로 국회를 찾아 여야 정치권과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 진정성을 갖고 호소하고 협력을 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독선과 독단의 목도리를 두른 목이 뻣뻣한 권위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국민은 ‘쫓겨나는 대통령’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런 불행은 모두에게 비극이다.

아름다운 퇴장은 글렀다 하더라도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걸어 나가는 대통령이 보고 싶은 것이다.

여야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여당은 이미 국정 추진 동력을 잃어버린 대통령 못지않게 콩가루 집안이 되어버렸다.

반성을 전제로 한 사태 수습보다는 계파로 나눠 그야말로 ‘진흙탕 속 개싸움’을 벌이는 형국이다.

야권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나 정부의 불행을 즐기는 듯하다.

끌어내리고 야유하고 겁박하는 모습은 국정 파트너나 수권정당의 모습은 아니다.

대통령을 하야 시켜 어찌 하겠다는 것인가. 초법적 대통령 하야가 불러올 국가적 불행과 국정중단의 혼란과 위기를 감담 할 자신은 있는가.

그런 혼란을 틈타 손쉽게 권력을 거머쥐려는 욕심은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이미 대통령이 된 것처럼 행보를 보이는 유력 정치인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씁쓸하다. 비판이 시니컬하다.

진정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걱정한다면 '거리 촛불'을 부채질하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장외투쟁을 할 것이 아니라 국회 내에서 정치적으로 혼란을 수습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것이 국민이 위임한 국회의 책무이며 정치력이다.

‘불을 더 밝게 하여라. 나는 어둠속에서 집으로 가고 싶지는 않구나(Turn up the light. I don't want to go home in the dark)'.

오 헨리가 죽음에 앞서 했던 말로 전해진다.

국민들 역시 어둠의 길을 가고 싶지 않다.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 국가지도자들이 불을 더 밝게 하여 국민을 이끌어야 할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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