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블스 에드버킷(Devil's Advocate), 번역하면 ‘악마의 대변인’이다.

1997년 개봉됐던 할리우드 영화다. 출세와 뒤틀린 욕망에 사로잡힌 한 젊은 변호사가 악의 유혹의 빠져 점점 인간성이 망가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소도시 출신 케빈 로막스는 야심찬 신참 변호사였다.

변호사 개업 후 재판에서 64연속 무패 행진의 승소를 기록했던 앞길이 유망한 젊은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평소 꿈꿨던 뉴욕 맨해튼 최고 상류사회로 진출하게 됐고 거대 로펌회사 회장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는 점점 돈과 출세의 유혹에 빠져 들어갔다, 악의 유혹에 영혼을 팔아버린 것이다.

피고인이 악랄한 범죄자임을 알면서도 돈과 명예에 취해 무죄를 주장하는 ‘악마의 대변인’이 되었다.

법과 양심에 따른 정의의 대변자인 변호사가 자본주의 사회의 허영과 욕망에 사로잡혀 양심을 버리고 ‘악마의 대변인’이 되고 자신도 악마가 되는 과정을 그린 섬뜩한 스토리다.

영화에서 말하는 ‘데블스 에드버킷’은 악을 변호하는 악의 변호사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악마의 대변인’은 이와는 반대다. 악을 변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을 파헤치는 사람이었다.

‘악마의 대변인’은 1587년 만들어진 가톨릭교회의 직책이었다.

이때부터 가톨릭교회는 성인(聖人)으로 추대되는 후보자의 잘못이나 단점을 이야기 해 줄 반대자를 임명했다. 이 사람이 ‘악마의 대변인’이다.

‘악마의 대변인’은 성인 후보자에 대해 성인이 될 수 없는 결격 사유를 밝혀 고발함으로써 ‘성인’이라는 고귀한 지위의 정통성과 성스러움을 굳데 지키자는 제도였다.

성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악마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악마조차도 문제점을 집어내지 못할 때 성인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라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악마의 대변인’은 악이나 악의 세력을 옹호하거나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되레 악을 까발리고 추방하려는 ‘악의 고발자’인 것이다.

그래서 정부나 기업 등 거대 조직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악마의 대변인’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 의도적으로 반대의견을 제시하여 열띤 토론을 유도하고 거기서 합리적 의사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심리학자 어빙 제니스는 ‘다수의 힘에 주눅 들어 침묵하는 ’집단사고(Group thinking)'의 함정을 경고한 바 있다.

다른 의견을 가졌으면서도 다수결의 힘에 눌리어 침묵하는 인간본능이 집단사고의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견해다.

‘갈등 없는 만장일치’나 ‘다수결 원칙의 집단주의 사고’가 무조건 정의이거나 항상 지고지순의 선일 수만은 없다‘는 시각인 것이다.

다수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소수를 짓밟고 사고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독선과 극단적 도그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그래서 다수 우월주의의 함정을 경계하기 위해서 조직 내에 ‘악마의 대변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중영합주의에 편승한 거칠고 발칙한 목소리가 일반의 심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소위 ‘촛불 민심’에 올라 타 한 건 올리려는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의 비겁, 입으로는 법치를 외치면서도 법을 무시하고 민중을 선동하는 야비한 ‘고성불패(高聲不敗) 그룹’의 기고만장, 시류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정치평론가들의 카멜레온 식 변신, 스스로 지식인을 자처하면서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폴리페서 등의 일탈도 마찬가지다.

특히 언론은 국가적 사회적 의제에 대해 잘잘못을 가려 여론을 올바르게 선도하고 사실과 진실을 바탕으로 정의를 이끌어가야 할 ‘악마의 대변인’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작금의 언론 행태는 목소리 큰 쪽에 빌붙어 줄타기 하는 기회주의적 우유부단에 익숙해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종편’의 경우도 그렇다.

‘종편’은 2011년부터 방영되는 ‘종합편성채널’의 준말이다. 드라마·오락·스포츠뿐만 아니라 뉴스보도까지 모든 프로그램을 24시간 방송할 수 있는 채널이다.

그럼에도 최근 ‘종편’에 대한 일반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다. 냉소적이다. 혐오스럽다는 독한 말까지 서슴없다.

‘뉴스 특보’니 ’단독보도’니 하면서 하루 종일 틀었던 것을 돌리고 돌리는 ‘레코드 판 프로’는 짜증을 부른다.

역시 이 ‘종편’, 저 ‘종편’을 다람쥐 채 바퀴로 돌면서 앵무새처럼 한 말 또 하는 소위 정치 평론가들의 ‘회전목마 식 출연’도 식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만물박사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심지어는 연예와 스포츠 관련까지도 모르는 것 없이 나불댄다.

그 얼굴이 그 얼굴, 그 말이 그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는 독이 묻어있다. 방송이 시작 된지 6년이 지났으나 변한 것이 없다. 왜곡과 편파는 그들의 계급장이요 자산이다.

그래서 ‘종편’은 ‘종일편파방송 채널’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들의 왜곡과 편파는 일관성이 없다. 같은 사람, 같은 사안을 두고도 평론은 널뛰기식 양 극단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처음에는 별별 아양을 다 떨었다.

‘옷매무새가 곱다’며 ‘박근혜 패션은 뒤에서 광채가 난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백전백승의 선거여왕‘, ’냉철한 원칙 주의자‘, ’온화한 카리스마’, 등등 부끄러움도 모르고 열심히 입술에 침을 발라댔다.

요즘은 어떤가. ‘고집불통’은 예삿말이다. 멍텅구리, 바보, 수준이하의 대통령 등등 말의 매타작은 거침이 없고 살똥스럽다.

몇 십 년전 과거를 들추어내면서 본질과 거리가 먼 안방 엿보기식 관음증은 도가 지나치다.

정확하게 드러난 물증이나 사실이 확인된 근거도 없이 미확인 소문이나 추측, 편견 심증만으로 매도하고 조롱하고 증상모략하며 선동하는 행태를 진정한 언론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라는 명분으로 객관성과 전문성 보다는 무책임한 인사들의 말장난에 기대어 선동하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사이비일 뿐이다.

‘촛불 민심’이라는 이름의 광장민주주의는 나름대로 평가하고 긍정할 만하다.

정치나 언론, 대학 등의 비겁한 침묵을 일깨우고 민심의 흐름이 어디 있는 지를 알려주는 신문고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질서 있는 외침이나 깨끗한 뒤 마무리에 대한 세계적 찬사도 자긍심을 갖고 뽐낼 수 있는 자랑거리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 집회가 계속되고 분노의 쓰나미가 정치혐오, 경제파탄 등 다른 사회적 문제를 생산하는 것은 위험하고 경계할 일이다.

집단사고에 휩쓸려 사회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때 균형 있고 합리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악마의 대변인’이 필요한 것이다.

군중심리에 영합하지 않고 차가운 머리와 냉철한 판단으로 집단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악마의 대변인’역은 바로 언론의 몫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와중에 이러한 ‘악마의 대변인’역할 이 제대로 작동되었더라면 지금 같은 정국불안과  국회탄핵으로 인한 박근혜대통령의 불행은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의 해인 올해, 대통령을 꿈꾸는 후보자들에 대한 ‘악마의 대변인’ 검증이 절대 필요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악마적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종편’등 언론에 쓴 소리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일 편파 방송’이 아니고 ‘종일 편한 방송’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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