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오(희곡작가)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할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90년대 후반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자우림의 노래 ‘일탈’은 아직까지도 노래방의 애창곡으로 남아 환희와 열광을 유도한다. 노래가사처럼 미친 짓이라도 하고 싶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저 목청껏 내지르는 노래로라도 일탈을 감행하고 싶은 것이 애 어른 할 것 없는 요즘 사람들의 내심이다. 미친 짓이 두려우면 어디론가 훌쩍 여행이라도 감행하는 무모한 선택을 하고 싶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지루하고 우울한 나날의 반복, 일탈을 위한 어떤 것도 주저하는 결정 장애, 우리는 언제쯤이면 낯선 세상으로의 일탈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들은 신이었기에 가능했을까? 신화 속의 영웅들은 일상에서 분리되는 선택에 주저함이 없고 낯선 세상에 입문한 뒤의 난관도 끝끝내 이겨내 위대한 귀환에 성공한다. 신화학자 조셉 켐벨의 말처럼 ‘분리, 입문, 귀환’을 통해 신의 지위에 오르는 영웅들의 사연을 접할 때마다 나는 저렇게 될 수 없을까 하는 동화 같은 판타지를 그려보곤 한다. 그러나 나에겐 신화 속의 영웅처럼 비범함이 없고,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도움을 주는 운명의 조력자도 없어 스스로가 더없이 측은해진다.

신화 속의 비범한 존재들은 스스로 타고난 권능도 있거니와 그들과 같거나 어쩌면 그들을 뛰어넘는 능력을 지닌 조력자들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어쩌면 이 조력자들이 더욱 매력적인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주인공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사정에 따라서는 적대자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신화 속의 조연이면서 주연을 압도하는 매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들의 매력은 마치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영화의 단골조연들이 뿜어내는 아우라와도 비슷하다. 제주의 신화 속에도 당연히 빼어난 조연들이 존재한다. 그들 중 몇몇을 만나보기로 하자.

첫 번째 조연은 ‘마고할미’다. 제주신화에 마고할미가 등장한다고? 마고할미는 금시초문일 게다. 거듭 말하거니와 마고할미는 제주신화에도 분명히 등장한다. 이 여신은 ‘청태산 마귀할망’, ‘청태국 마구할망’ 등의 이름으로 여러 본풀이 속에 불쑥불쑥 나타난다. 다른 지역에서 ‘천태산 마고할미’라고 부르는 명칭과도 매우 비슷하다.

먼저 사람의 생명과 이어진 생불꽃이 자라는 서천꽃밭의 사연이 담긴 이공본풀이를 보자.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사라도령과 상봉한 ‘신산만산 할락궁이’의 귀환과정에서 ‘청태국 마귀할망’이 조력자로 나선다. 적대자 수명장자에게 복수하고 어머니를 되살리려는 할락궁이에게 사라도령은 청태국 마귀할망을 만나라고 한다. 이에 마귀할망을 만난 할락궁이는 그의 도움으로 수명자장의 막내딸을 불러내고 마침내 복수에 성공한다.

세화리본향당의 ‘금상님 본풀이’에도 그는 등장한다. 임금의 질투로 인해 무쇠철망에 갇힌 채 뜨거운 불길에 던져진 금상님이 정신을 놓자 ‘청태산 마귀할망’이 현신해 “어리석고 미혹한 장수야. 불에 타 죽고 싶지 않으면 깨어나라”라는 노래를 불러 금상님을 깨운다.

저승의 삼차사 중 인간차사인 ‘강림차사’의 사연을 차사본풀이에는 이 여신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먼저 재물에 눈이 어두워 ‘버물왕 삼형제’를 죽인 ‘과양셍이각시’의 집에 불을 얻으러 왔다가 화로 속에서 ‘버물왕 삼형제’의 화신인 ‘삼석백이 구슬’을 발견하는 것이 ‘청태산 마구할망’이다. 과양셍이각시는 이 구슬을 삼킨 뒤 임신을 하고 세쌍둥이를 낳아 한날한시에 과거급제를 시켰건만 곧바로 이유 없이 죽어버린다. 이에 과양셍이각시는 ‘짐치원님’을 찾아가 염라대왕을 잡아들여 재판을 해달라며 생떼를 쓴다. 사또는 할 수 없이 강림에게 염라대왕을 데려오라며 저승으로 보낸다. 산 사람의 몸으로 도무지 알 수 없는 저승길을 찾아 나선 강림이 아흔아홉 갈림길에서 헤맬 때 불에 탄 행주치마를 입은 청태산 마구할망이 “나는 너희 집의 조왕할망이다.”라고 하며 길을 가르쳐주는 결정적인 조력자 노릇을 한다.

문전본풀이에서는 ‘노일저대귀일의 딸’에게 속아 넘어가 자기 아들 일곱 형제를 죽이려고 칼을 갈던 ‘남선비’ 앞에 ‘청태산 마구할망’이 나타나 자초지종을 캐묻는다. 끔찍한 사실을 알아낸 마구할망은 아들들에게 이 사연을 알려 살아날 방도를 찾게 해준다.

이렇게 ‘청태산 마귀할망’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신화에 등장하는 마고할미는 남성중심의 역사시대로 접어든 이후 존재감이 약해진 고대의 여신의 모습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불’과 관련이 많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불’이야말로 프로메테우스의 천형을 낳은 결정적인 문명의 요소인 것처럼 고대의 여신 청태산 마귀할망은 불을 빌리러오거나 불길에 휩싸인 영웅을 구출한다. 그도 아니면 불에 탄 치마를 입고 저승길을 인도한다.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치마’라는 옷감의 의미는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치마가 자연계의 질서창조라면 불은 문명창조라고 볼 수 있다. 신화 속의 조력자로 등장한 마고할미가 끝끝내 불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창조의 권능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고할미보다 더욱 잦은 출연으로 이목을 끄는 존재도 있다. 쉴 새 없이 거의 모든 신화에 등장하는 이들의 이름은 ‘느진덕이정하님’, ‘수장남 수벨캄’이다. 이들은 주로 신이 될 운명을 타고난 고귀한 존재의 하인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조연이라기보다 엑스트라에 가까울 정도로 그들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그저 머슴 본연의 심부름꾼 역할을 할 뿐 이렇다 할 영향력이 거의 없다. 그런데 세경본풀이에서는 단역신세의 설움을 한 방에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주인공의 조력자이면서 적대자인 변화무쌍한 트릭스터로 등장해 엄청난 역할을 한다. ‘정이어신 정수남이’가 바로 수장남 수벨캄의 다른 모습이다. ‘문국성 문도령’을 찾아 나선 ‘자청비’를 돕는 척하더니 호시탐탐 건수작을 부리며 성희롱을 일삼다 결국 범하려고 했던 상전에게 되레 죽임을 당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죽은 것이 억울했는지 부엉이로 환생해 서천꽃밭을 망쳐놓았다가 자청비의 도움으로 되살아나기까지 한다.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상세경이 된 문도령, 중세경이 된 자청비와 더불어 하세경이 되어 농경의 신인 ‘세경신’ 중 하나의 지위까지 오른다. 마소를 다루던 하인답게 목축의 신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청태산 마귀할망’, ‘정이어신 정수남이’의 존재감을 단숨에 압도하는 최고의 트릭스터는 단언컨대 ‘동이용궁따님애기’다. ‘멩진국할마님본풀이’에 의하면 동해용왕의 셋째 딸 또는 막내딸로 태어난 이 여신은 제주섬의 마른땅을 처음 디딜 때에는 ‘임나라 임박사’로부터 아이들을 점지하고 무탈하게 자라게 하는 ‘삼싱할망’의 신직(神職)을 받았었다. 그러나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멩진국따님애기’와의 경쟁에서 패해 ‘구삼싱할망’이 되어 아이들의 크고 작은 질병을 관장하는 신이 된다.

동해 용왕의 딸이 당신(堂神)으로 좌정한 표선면 토산1리 웃당

이렇게 최초의 삼싱할망이었던 이 여신은 제주도 여러 마을의 당신화에서도 용궁을 떠나 제주로 들어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혼자서 제주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한라산 어딘가에서 솟아났다는 남신의 부인이 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서귀포시 중문동 불목당의 당신(堂神) ‘중문이하로산또’, 송당마을 부부신의 일곱째 아들인 구좌읍 김녕리 궤네깃당의 ‘궤네깃또’, 송당본향당신 부부의 또 다른 아들 표선면 하천리 본향당의 ‘개로육서또’ 등이 동이용궁따님애기의 남편신이다. 용왕의 딸인 것으로 보아 해신(海神)인 이 여신이 한라산에서 솟아난바 산신(山神)의 성격이 분명한 남신과 결합하는 것은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제주섬의 지리적 여건에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없다. ‘산신(山神)=남신, 해신(海神)=여신’이라는 공식을 낳은 이 여신은 단지 남편신의 부인에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 마을의 주신(主神)이 되기도 한다.

송당마을본향당 부부신의 아들 중 하나인 표선면 토산리 웃당의 ‘ᄇᆞ름웃또’의 부인이 되어 좌정하기까지의 사연을 보면 이 여신의 권능이 제주도 온 마을에 뻗어있음을 알게 된다. ‘일뤳또본풀이’에 의하면 부모에게 버림받아 무쉐석함을 타고 용궁까지 들어온 ᄇᆞ름웃또와 혼인한 동이용궁따님애기는 용왕에게 비루먹은 망아지와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요술부채를 받고 뭍으로 올라와 ᄇᆞ름웃또의 부모신을 찾아간다. 시어머니는 ‘금백조’는 며느리로 인정하며 땅과 물까지 내어준다. 이에 ᄇᆞ름웃또의 본부인은 작은 부인으로 들어온 동이용궁따님애기가 받은 땅이 얼마나 큰지 임신한 몸을 이끌고 살펴보러 돌아다니던 길에 목이 말라 돼지발자국에 고인 물을 허겁지겁 마신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낸 ᄇᆞ름웃또는 본부인더러 부정을 탔다며 마라도로 귀양을 보낸다. 임신한 몸으로 길을 떠난 본부인이 마라도로 귀양을 가자 동이용궁따님애기는 ᄇᆞ름웃또를 크게 타박한 뒤 본부인을 찾아 마라도로 간다. 마라도에서 일곱 아기를 출산한 본부인은 동이용궁따님애기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며 자신은 바다를 에둘러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이에 동이용궁따님애기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던 길에 막내아이를 잃어버리자 본부인까지 나서서 아이를 찾아낸다. 하지만 아이는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여러 가지 질병에 걸려 있었다. 동이용궁따님애기는 이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건강을 되찾게 한 뒤 토산마을의 당신(堂神)으로 좌정한다.

토산마을 웃당(윗당)의 본향당신 중 하나로 좌정한 동이용궁따님애기는 위와 같은 이력 때문에 아이들의 병마와 사고를 막아주는 일뤳당신(이렛당신)과 같은 역할의 신이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멩진국할마님본풀이에서는 나쁜 병마를 일으키며 해코지를 하는 신인 구삼싱할망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병마를 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막아주는 야누스의 모습을 가진 이 여신이야말로 제주신화 속에서 가장 다면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뿐 아니라 제주의 마을이라면 으레 한 곳씩은 갖추고 있는 ‘일뤠할망’을 모신 ‘일뤳당’의 원조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일뤳당에 본풀이가 전하지 않을뿐더러 비념을 넘어서는 큰 규모의 굿을 행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제주굿의 기메 中 요왕기

바다에서 태어나 뭍으로 올라와 ‘일뤳또’ 또는 ‘구삼싱할망’의 양면을 지닌 여신으로 좌정한 동이용궁따님애기의 일탈과 모험 같은 여행을 살피다보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도 이처럼 무모한 도전 끝에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들이 겹쳐진다. 사회적 출세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일에 도전하고, 사회적 억압에 맞서 자유를 외치는 일탈을 감행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엉뚱하고 독특한 창의성을 표출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것이다. 일탈과 여행을 도피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라도 낯선 곳으로의 일탈을 통해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라. 동이용궁따님애기처럼.

*참고자료

강정식, 제주도 당신본풀이의 전승과 변이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진성기, 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 민속원

현용준, 제주도무속자료사전 개정판,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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