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제주도종합개발계획 수립 이후 제주 사회는 오랫동안 개발을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개발만 하면 제2의 하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넘쳐났다. 개발에 대한 기대감은 제주도가 곧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제주도개발특별법과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개발과 발전은 놓칠 수 없는 과제였다. 하지만 지금 제주는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1500만 관광객 시대가 왔고 이주민들이 늘어났다. 제주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환호 뒤에서 제주 섬은 교통, 쓰레기, 주택 문제 등 심각한 도시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성장만 하면 제주도민 모두가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낙수효과는 하나의 신념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신념 뒤에서 개발의 부작용과 불평등은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취급되고 있다. 제주오라관광단지, 예래동 휴양단지, 제주신화역사공원과 제2공항 건설 등 대규모 토목 사업은 여전히 제주의 미래를 보장하는 장밋빛 사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주투데이는 2017년 신년 기획으로 그동안 성장 우선주의의 길을 걸어왔던 지역의 문제를 돌아보고 성장의 신화가 남긴 그늘을 돌아보는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이를 위해 제주투데이는 2017년 <제주, 성장을 멈춰라>라는 주제를 아젠다로 설정했다. 그 첫 번째 기획으로 <제주에 드리운 박정희 ‘신화’의 그늘>을 연재한다.<편집자 주>

1976년 1월 1일자 제남신문은 <번영의 줄달음 박대통령과 제주도>라는 특집 기사를 게재한다. 기사의 시작은 이렇다.

박 대통령과 제주도- 이 관계는 곧 번영과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다. 64년 3월 14일 대통령에 취임하고 처음으로 제주도에 온 박 대통령은 제주도를 동양의 하와이로 발전시켜야겠다고 결심, 이도에 앞서 당시 김영관 지사에게 종합개발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박 대통령의 이 지시는 오늘의 풍요를 약속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도 그것은 천년을 가난 속에서 헤매던 제주도민들에게 잘 살아야 하겠다는 의욕을 갖게 한 최초의 팡파레이기도 했다.

기사는 어승생 수원지 개발과 일주도로 포장, 중산간 횡단도로 건설 등을 예로 들면서 이것을 “물의 혁명”과 “길의 혁명”이라고 말한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개발은 박정희 시대의 선물로 여겨졌다. 박정희의 결단이 제주의 근대화를 백년 앞당긴 업적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제남신문 1976년 1월 1일자>

 개발독재시대의 개발 방식이 국가 주도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 같은 지적은 그동안 아무런 비판없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제주도가 근대화 된 것은 박정희 시대가 가져온 선물이었고 박정희는 혁명적 근대화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제주개발은 오로지 박정희이라는 ‘영웅’의 단독 기획이었을까. 제주 4·3으로 초토화 되었던 제주 사회는 국가 주도의 개발에 무조건적으로 박수만 보냈을까. 이러한 문제를 꼼꼼하게 살펴보기 위해서 당시 발간되었던 자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당시 자료들을 살펴보던 중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재일교포, 즉 재일제주인들을 경제 개발을 위한 동원의 대상으로 관리하였다는 점이다. 제12대 제주도지사를 지냈던 김영관은 1964년에 <재일교포에 대한 나의 신념>이라는 글을 《제주도지》에 발표한다. 해군 출신인 김영관은 1961년 5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제주도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5·16쿠데타 직후 제주도지사를 지냈던 인물로 그는 <제주개발 50년의 서막을 열다>에서 당시 국가재건최고위원회 의장이었던 박정희를 만나 제주도를 첫 방문지로 삼아달라고 요청했다고 증언한다. 그가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제주도지사를 그만 둔 후로 합동참모부 소속 군수기획국장이었다.

과거 정부는 이들을(재일제주인) 적색시(赤色視)한 나머지 그들을 경계하기에만 급급하였을 뿐 그들의 내면을 알려 하고 그들을 따뜻이 맞이하려고 하지 않았다.재일교포가 어쩌다가 그들이 낳아서 자란 고향을 찾아오는 일이 있으면 경찰은 그들을 출두시켜 죄인처럼 심문하였고 또 요시찰인물로 취급하여 뒤를 밟기가 바빴다고 한다. 물론 선량한 교포로 가장하여 침투하는 오열(五列)에 대한 경계가 긴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처럼 고향을 방문한 교포들이 한결같이 오열시(五列視)되어 경찰의 등살에 부대껴서 결국은 불안 속에 차가운 인상을 안고 모국을 떠나곤 했던 것을 상기할 때 당시의 당국자들은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따라서 재일교포들은 고국을 방문하는 것이 즐거운 일과가 될 수 없었고 또 웬만한 일 가지고는 고향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더구나 4․3 사건 이후에 도일하였거나 고향의 현 사정에 어두운 교포들은 고향에 찾아갔다가는 수사기관에 붙들려 족친다는 비언때문에 고향을 방문한다는 것은 염두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1964년이면 1963년 박정희가 제주를 방문한 이후 종합개발계획을 지시한 이후였다. 이 때 왜 하필이면 재일제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당시 시대상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이전 장면 정부에서 결렬되었던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물밑 작업에 착수한다.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경제 개발의 성패는 중요한 과제였다. 1961년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는 이케다 일본 수상과 회담을 연다. 이 회담에서 한일회담의 실무 과제를 연내에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일본의 경제 협력을 요청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1962년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 사이에 ‘김-오히라’ 메모도 이 때 교환되었다.

이 메모는 지금까지 한일관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대일청구권 문제에 관한 비밀 합의 각서이다. 한일회담을 조속히 성사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때 대두되었던 것이 바로 대일청구권 문제. 당시 이 합의각서에는 일본이 무상으로 3억달러는 10년에 걸쳐 지불하고 경제협력 명목으로 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 7년 거치 20년 상환이라는 조건으로 10년간 제공하며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과거 이승만 정부 시절에만 하더라도 이승만의 혐일 정책으로 일종의 버려진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쿠데다 직후부터 재일교포들을 적극적으로 호명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바로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1964년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의 수립으로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재원 확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상에 서둘렀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김인덕,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과 구로공단: 해방 이후 재일동포의 국내 경제활동과 관련하여」,) 이와 별도로 제주 지역에는 1964년 제주도종합개발계획 발표로 인해 근대화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 초도 순시-국가기록원>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에서 일정한 경제적 성공을 거둔 재일교포들은 손쉽게 자금동원을 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재일교포 자금 동원 문제는 긴급한 정책 과제로 여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1961년 이후 실시된 ‘재일교포 방문’은 1964년까지만 하더라도 일곱 차례였고 제주도에서 산업경제시찰단을 조직해 일본을 방문한 것도 두 차례였다. 이러한 교류의 확대로 일본에서 제주로 유입된 자금은 현금이 한화 1300만원, 기계류를 포함한 현물이 8500만원 상당, 묘목이 140만원 정도였다.(1964년 4월말 기준) 재일제주인과의 경제교류 확대를 위해 제주도는 1962년 일본에서 결성된 재일제주도개발협회 주요 인사를 제주도로 초청해 좌담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좌담회에는 강우준 제주도지사를 비롯해 제주도경찰국장, 제주방송총국장 등 지역 유지들이 대거 참석했다. 참석자의 면면만 보더라도 재일제주인과의 경제교류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날 좌담회에서 특기할 점은 제주도경찰국장의 발언이다. 경찰국장은 재일조선인의 입국과 관련하여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략) 본도 경찰은 교포들에 대한 입국심사를 하지 않을 방침입니다. 둘째 연쇄적인 책임문제입니다. 가족 가운데 어느 한 사람으로 인한 사상문제를 전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중략) 셋째 요시찰인에 대해 관용을 베풀고 있습니다. 현재 그 대상자가 3200명이나 되는데 극렬분자로 인정되는 20여명만을 제외하고는 여기에 대한 감시를 해소하고 있습니다. (중략) 넷째 현재 본도출신 교포가 약 15만이나 된다고 하지만 정식으로 등록된 사람은 극히 적다고 합니다. 제주도개발협회에서는 나머지 교포들의 명단을 파악하셔서 제주도 출신 교포수의 완전한 파악에 많이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향토개발과 재일교포」, 제주도청, 『제주도』)

교포들에 대한 입국 심사를 간소화하고 심지어 연좌제 문제까지도 관용을 베풀고 있다는 경찰국장의 발언은 해방 후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 문제 등을 감안한다면 의도된 왜곡 혹은 제한된 조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해방 이후 밀항은 그 자체로 불법이었다. 사상문제 등으로 인해 해방 이후 도일한 밀항자들 대다수는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일본에서의 재류자격이 제한되었다. 특히 일본 정부와 GHQ의 재일한국인 재류관리 조치에 의해 1947년 5월 2일 외국인등록령이 강화되었다. 외국인 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해방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는 증명이 필요했고 밀항으로 온 사람들, 특히 거주 증명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숨어 지내야만 했다. 경찰국장이 여기에서 말한 “등록문제”란 밀항으로 인한 불법 체류자들의 외국인등록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목할 것은 ‘재일교포’와 지역과의 경제적 교류가 ‘향토애’로 표상되는 자발성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1923년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로 많은 제주인들이 일본으로 도항하면서 제주 경제는 오사카 경제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특히 제주인들의 도항과 그 후 정착과정이 상호부조적 성격을 띠면서 제주와 재일제주인과의 경제적 교류는 마을 친목회, 향우회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37년에 발행된 『제주도세요람』에 따르면 1927년 재일제주인의 송금액 규모는 77만4784엔으로 일인당 송금액은 평균 27엔이었다. 1933년에는 송금액이 85만7000엔으로 늘어났고 일인당 송금액도 29엔에 달했다. 송금액 이외에도 제주로 귀향할 때 소지하고 들어온 금액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면 식민지 시기 재일제주인의 도항과 귀향이 제주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의 경제교류는 그 필요성이 지역 내부, 특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제주도종합개발계획 수립으로 인한 위로부터의 기획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부터의 기획은 ‘애향심’과 ‘향토애’라는 자발성을 수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에 『제주도』지에 실린 「재일교포의 자본도입문제」는 1960년대 이후의 경제교류가 철저한 국가 기획의 소산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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