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제주시청 민원실 앞 도로에 태극기를 손에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군복을 차려입은 사람도 있었다. ‘종북좌파 몰아내자’는 손팻말을 손에 든 여성도 눈에 띄었다. 간혹 20대도 눈에 보였지만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18차례 촛불집회가 열리는 동안 제주의 광장에서 태극기 집회가 열리지 않았다. 지난 2월 제주항일기념관에서 탄핵 반대 집회를 열었던 극우 성향의 하모니십연구소(대표 신백훈)가 이날 태극기 집회를 열면서 극우 성향의 단체들과 친박 단체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전날 저녁 촛불의 함성이 가득했던 거리에 태극기가 바람에 흔들렸다.

행사 시작 전부터 트로트 음악으로 흥을 돋우던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찬양하는 노래인 ‘무궁화’가 흘러나오자 입을 모아 노래를 따라 불렀다. 무대 앞 스크린에는 박정희, 박근혜 부녀의 옛 사진들이 비춰졌다. 연단 위에 오른 사람들은 인사 대신 ‘충성’, ‘필승’을 외치며 경례했다. 

초청가수도, 뉴욕에서 왔다는 퇴역 군인 홍종진 씨도 모두 경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자유한국당 강지용 도당위원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시춘 작곡의 <전선야곡>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작곡한 <나의 조국>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참석자들은 한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입을 모아 노래를 따라 불렀다. 자신을 스마트 의병대장이라고 소개한 신백훈 씨는 연단 위에 올라 이날 집회에 참석한 보훈단체 회원들을 소개했다. 베트남전을 치렀던 그들의 손에는 총 대신 태극기가 들려있었다. 그들에게 탄핵을 강행한 국회는 해산해야 할 악의 집단이었다. 청중에서 “국회를 해산하라”라는 외침도 터져나왔다. 이들에게 정규재 뉴스를 빼고는 한국의 언론들을 모두 썩어빠진 집단이었다. JTBC 보도는 거짓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나라와 결혼한 순결한 정치인이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촛불이 사라진 광장에서 이들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고 그들에게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상징이자 ‘종북좌파’를 향해 겨눈 한 자루의 ‘총’이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채 ‘검찰도 특검도 고영태와 한통속’이라는 손팻말을 가슴에 매단 홍종진 씨는 “촛불은 인민의 마음이고 태극기는 국민의 마음”이라고 외쳤다. ‘인민과 국민’ ‘People’과 ‘Nation’의 거리는 멀고도 사나웠다. 광장에서 만난 기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한 기자는 “참담하다”는 말로 취재 소감을 대신했다. 기자가 객관의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이날 기자들은 객관의 거리 대신 주관의 자리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주관은 기자의 윤리를 망각한 편파가 아니었다. 상식을 외면한 ‘어른’들을 바라보는 상식의 한탄이었고 안타까움이었다.

집회 참석자 중 한 명은 어린아이들에게 “절대 촛불집회에 가지 말라”고 훈계를 했다. 그의 언어는 아이들을 악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야 한다는 사명감의 언어였고 자기 확신이었다. 젊은 날 유신을 지냈고 산업화의 역군으로 참여했던 이들에게 체험 지식은 학습 지식보다 견고했다. 그들에게 경험은 지금의 탄핵 사태를 보는 판단 기준이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는 연단 위에 올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보수의 뿌리라고 치켜세웠다. 광주 5·18이후 36년동안 도처에 퍼진 암 세포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종북좌파’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시민들이 집회 현장을 지나가며 “미친 짓”이라고 낮게 읊조렸지만 그들에게 이런 비판은 들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들의 구호는 커졌고 목소리는 우렁찼다. 그들에게 전두환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할 사람이 아니고 박정희야말로 제주도 개발을 이끈 훌륭한 리더였다. 자신이 도지사 시절 만들었던 삼다수를 손에 든 채 신구범 전 지사는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외쳤다.

3시간 동안 집회 현장을 지킨 그들을 버티게 해 준 것은 법치 수호의 구호와 간간히 흘러나오는 트로트 가요였다. 트로트가 일본의 요나누키 음계를 바탕으로 한 엔카에 뿌리를 두고 있고 박정희가 만들었다는 <나의 조국>이 일본 군가풍을 그대로 모방한 ‘일본 풍’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애국을 외치는 그들은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보이는 것만 보았고 믿고 싶은 것만을 진실이라고 외쳤다. 애국은 그들에게 방패였고 갑옷이었다. 두터운 갑옷 속에서 애국을 외치는 그들의 구호는 갇혀서 맴돌았다. 충성과 필승을 외치고 애국을 부르짖는 그들의 구호가 광장에 태극기와 함께 흩어졌다. 광장에 떨어진 오염된 언어들이 그들의 발 아래 짖밟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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