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김석범과 김시종을 읽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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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김석범과 김시종을 읽어야 하는 이유
  • 김동현 책임 에디터
  • 승인 2017.03.0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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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정명(正名), 해방공간 제주민중 주체성 재조명되어야

3·1 절이다. 3월 1일은 제주에서 특별하다. 제주 4·3의 시발점이 된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한 날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3·1절 발포사건 70주년이다. 내년이면 4·3 70주년. 이미 제주에서는 4·3 70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범도민적 모임이 결성됐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4·3은 여전히 바른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나서 식민지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사슬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은 함석헌 선생이 말했듯이 “도적처럼 온 해방”이었다. 8월 15일은 미국, 영국,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입장에서는 승전일이고 일본에게는 패전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해방은 또 다른 식민의 시작이었고 분단 체제가 만들어진 날이었다.

4·3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던 1978년, 제주 4·3의 진실을 소설로 그려낸 작가는 현기영이다. 「순이삼촌」은 그동안 오랫동안 은폐되어 있었던 4·3의 진실을 수면 위로 꺼냈다. 하지만 현기영 말고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작가들이 있었다. 바로 김시종과 김석범이다.

김석범은 1925년생이고 김시종은 1929년 생이다. 아흔을 넘거나 바라보는 노작가들은 제주가 아니라 일본 땅에서 제주 4·3을 잊지 않았다.4·3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이미 정부차원에서 4·3 진상조사보고서가 작성되었고 대통령의 사과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4·3을 무장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세력도 존재한다. 70년이라는 세월은 한 인간이 태어나 아이에서 성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는 시간이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자란 김시종 시인은 3·1절 발포사건의 직접 목격자이기도 하다. 지금은 요양병원이 있는 자리가 옛 식산은행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계단에 3·1 절 발포사건 당시 총상을 입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남로당 조직원이었던 김시종 시인은 4·3의 직접 체험 세대였고 그날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김시종 시인은 오랫동안 제주 4·3을 다룬 작품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그날의 기억이, 1949년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도망치듯 밀항해야 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시종 시인은 광주 5·18 항쟁을 다룬 <광주시편>을 통해 권력의 폭력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4·3이 없었다면 광주시편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4·3은 해방공간의 제주라는 지역에서 발생한 국지적 사건이 아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4·3당시 미국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이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한반도와 일본을 점령한 미군의 정책은 사뭇 달랐다. 한반도 이남에서 1947년 여름 이후 남로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은 미군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해방 당시만 해도 몽양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을 비롯한 좌파 정당들은 합법적 활동을 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제주 4·3을 이야기할 때 빠지는 함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주 4·3을 지금의 시각에서 재단하는 것이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우리는 유례 없는 분단 체제를 경험하게 됐다. 분단은 이념의 잣대로 서로를 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적이 일본이었다면 지금은 우리가 서로를 적국으로 대해야만 했다. 이런 적대적 시각으로 해방공간이라는 대단히 특수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4.3을 이해하는 것은 4.3에 대한 접근을 형해화(形骸化) 하는 일이다.

1946년 8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1946년 8월 13일 동아일보에는 미군정청이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가 실려 있다. 여기에 실린 설문 하나는 바로 해방 이후 정치 체제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답변이다. 놀랍게도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한 비율은 14%(1189명)뿐이다.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를 선택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당시 77%가 넘는 사람들이 모두 소위 ‘좌파세력’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시대정신을 가장 잘 실현할 정치 결사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안다면 이런 설문 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식민 지배를 경험했던 조선에서 시급한 과제는 식민 잔재 청산과 독립국가 건설이었다. 이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가 토지개혁문제였다. 일부 소수의 지주들이 독점하는 토지 소유 체계를 개편하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해방 이후 경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제주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해방 이후 13만 명이 넘는 재외 제주 도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 오사카 방직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들도, 저 멀리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돌던 해녀들도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해방 이후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 등 일제 치하에서 조선 민중들이 가장 고통 받았던 정책을 그대로 시행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다. 당시 한반도 이남을 점령했던 미군정의 조선 인식은 전무했다. 미군정청 포고령 제1호에서 그들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진주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입장에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할 아시아의 반공 교두보를 확보하는 문제는 조선의 독립보다 더 시급한 과제였다.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은 해방 이후 상황에 대한 치밀한 모색을 통해 제주 4·3을 도민들의 주체적 선택과 그러한 선택이 국가 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당한 권력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4·3 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 사과문 이후 제주 지역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이른바 희생 담론을 생각한다면 김석범의 이런 인식은 제주 4·3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이다.

이미 70주년 기념사업회에서는 그동안 제주 4.3의 겨울을 이야기했다면 이제 4.3의 봄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4·3의 겨울이 폭력적 진압과정과 그로 인한 제주도민들의 피해에 대한 진실을 묻는 것이라면 제주 4·3의 봄은 해방 공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제주 도민들이 주체적 선택과 그것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1절 발포사건 70주년을 맞는 3월 1일. 김시종과 김석범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동안 제주 4.3을 무고한 희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스스로의 주체적 선택과 가능성은 외면해왔다.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아직도 세워지지 않는 백비가 있다. 작가 현기영은 이 백비가 온전히 세워질 때 제주 4·3의 정명이 이뤄질 것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한다. 4·3의 정명. 3·1절 발포사건 70주년을 맞는 오늘, 깊이 생각해야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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