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오강남 풀이, 현암사, 1999) 읽기 ― ①

홍기돈(문학평론가, 가톨릭대학교 교수)

요즘 어디 나다닐 데가 있으면 『장자』(오강남 풀이, 현암사, 1999)를 끼고 나섰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서 한 구절 읽고 곰곰이 생각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쪽 방면의 견해를 처음 접한 것은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윤재근, 둥지, 1990)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이 책을 접했을 당시 나는 열렬한 마르크스보이였고, 그러한 까닭에 장자의 사상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에 머물렀을 뿐,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현실사회주의 국가는 허물어졌고, 이후 환멸(幻滅)의 시간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아, 나침반 없이 부유하는 시대에 나는 어디 닻을 내려야 하나.

『장자』는 취생몽사(醉生夢死) 상태로 환멸의 시간을 견디어 낼 즈음 처음 읽었다. 함께 꿈꾸었던 이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떨어져 나간 그들이 너저분한 현실 어느 곳에 쭈뼛쭈뼛 뿌리 내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완고한 현실의 불변성 수리(受理)야말로 유물론자의 태도라 강변해 대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나는 “삶의 질서에 몸을 내맡기면 저렇게 삶에 중독될 수도 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노라 어느 글에서 써 내려간 바 있다. 허망한 깨달음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와중 문득 떠올랐던 이야기가 『장자』의 ‘나비의 꿈’이었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가. 기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앞 내용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지. 심지어 꿈속에서 해몽도 하니까. 깨어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 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 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126) 생명을 입은 순간 나는 언제가 되었건 간에 결국 죽으리란 운명을 받아 안고 있었다. 그렇다면 삶이란 한바탕 꿈에 불과할 텐데, 왜들 저렇게 더 많이 가지지 못해 아귀다툼일까. 나비의 꿈 이야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꿈 이야기 말미에 ‘사물의 변화[物化]’라는 개념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다.

오강남 교수는 물화를 다음과 같이 풀어내었다.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 서로 어울려 있는 관계, 꿈에서 보는 세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가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꿈같은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개물이 제각기 독특한 정체성과 함께 ‘하나’라는 전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가 될 수 있는 불이성(不二性)이 병존하는 세계이다.”(136) 『장자』를 처음 접했을 때는 몰랐으나, 요즘 다시 들여다보니 오강남 교수의 설명은 불경에서 읽은 바 있는 ‘불일불이(不一不二)’ 관점에 닿아있는 듯하다. 다른 학자들은 『장자』의 물화를 어찌 파악하고 있으려나. 여유가 생겼을 때 찬찬히 비교해 볼 대목이다.

대체 과학적/도구적 이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자연 바깥으로 뛰쳐나와 자연을 개발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성립한 인식 능력이다. 물론 인간은 동시에 다른 인간 또한 수단으로 취급해 나갔으니 마르틴 부버 식으로 이야기하건대, ‘나와 너’의 관계가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 책임을 추궁해 들어간다면 데카르트주의와 대면하게 될 성싶다. 데카르트는, ‘나와 너’라는 관계 속에서 ‘나’의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 아니라, 이와 정반대로 세계를 들여다보는 단독자 ‘나’의 지위를 공고히 했기 때문이다. 기실 근대­체제란 낱낱의 개별자(個別子, individual)를 먼저 설정하고 난 뒤 사회는 개별자들이 사회계약론에 따라 구축한 합체(合體, assemblage)라는 가설 위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문학으로써 밥벌이를 하는 까닭인지 오강남 교수가 물화의 사례를 펼칠 때는 환하게 웃을 수밖에 없다. “종이는 구름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는 시에 다가서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지금 들여다보는 이 종이에서 구름을 볼 수 있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있을 수 없고 비가 없으면 나무가 없고, 나무가 없으면 종이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종이에서 구름뿐 아니라 햇빛과 비와 나무와 새소리와 공기와 하늘을 다 볼 수 있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이 종이에는 이런 것들,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들어가 있는 셈이다.”(136) 과학적/도구적 이성에 철저한 이들에게는 이러한 설명이 한낱 몽상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종이에서 구름으로 미끄러지는 이러한 방식의 사유를 선호한다.

반면 『장자』는 만물이 귀일하는 통체(統體, whole)를 전제한다. 예컨대 그것은 “모든 것이 원래 하나인데 달리 무엇을 더 말하겠느냐?”(101)라고 할 때의 ‘하나’이며, 온갖 변화를 주재하는 참주인이다. “변화를 주관하는 참주인(眞宰)이 분명히 있는데, 그 흔적을 잡을 수 없구나. 참주인이 작용하는 것은 믿을 만한데,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셈이지. 실체가 있지만 모양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73) 이때 만물(萬物)은 통체의 분신(分身)으로서 부분자(部分子, positioner)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니 부분자가 추구해야 할 참된 지식은 통체의 원리를 깨닫고 그와 하나가 되는 경지로 나아가는 데서 마련될 수밖에 없다.

“성인은 사물들이 새어 나갈 수 없어서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경지에서 자유롭게 노닙니다. 일찍 죽어도 좋고, 늙어 죽어도 좋고, 태어나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본받으려 하는데, 하물며 모든 것의 뿌리요, 모든 변화의 근원을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278) 이 대목에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첫째, 장자는 통체(=道)의 속성을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바, 이데아ㆍ천국ㆍ절대이성 따위 고정된 실체를 상정하며 면면히 이어져왔던 서구철학사의 궤적과는 달리, 변화하는 과정 가운데서 만물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둘째, 『장자』에는 분별지(分別智)를 경계하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하기는 하나, 변화의 근원인 통체에 따르고자 하는 지식에 대해서까지 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기실 변화는 『장자』에서 가장 강조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일 터이다. 제1편 ‘자유롭게 노닐다[逍遙遊]’의 첫 번째 이야기와 제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齊物論]’의 첫 번째 이야기가 모두 변화와 관련된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다음은 오강남의 설명이다. “제1편이 ‘북명(北冥)’의 물고기 이야기로 시작한 데 반해 제2편은 ‘남곽(南郭)’에 사는 자기(子綦)라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북과 남이 대조를 이루고, 물고기와 사람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둘 다 ‘변화(變化)’를 이야기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다만 그 변화를 제1편에서는 북명의 물고기가 붕새가 되는 ‘외형적 변모(變貌)’로 상징했는데 제2편에서는 남곽의 자기가 그것을 ‘내가 나를 잃었다’고 하는 ‘내면적 변혁(變革)’으로 표현한 것이 다르다.”(62)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근대­체제의 폐해는 극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물론 도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근대­체제의 폐해와 맞설 수도 있겠으나, 나와 너의 변화가 ‘탈근대’라고 이를 만한 수준에 육박하기 위해서는 <개별자―합체 세계관>을 뛰어넘는 인식론ㆍ존재론의 전환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장자』에서 읽어낼 수 있는 <통체―부분자 세계관>은 이러한 모색을 하는 데 커다란 영감을 준다. 내가 종이에서 구름으로 미끄러지는 방식의 사유를 선호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홍기돈(문학평론가, 가톨릭대학교 교수)

1970년 제주 출생으로 1999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학비평가로 등단하였다. 중앙대학교에서 1996년 김수영 시 연구로 석사학위를, 2003년 김동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평론집으로 『페르세우스의 방패』(백의)『인공낙원의 뒷골목』(실천문학) 등이 있으며, 연구서로는 『근대를 넘어서려는 모험들』(소명출판)『김동리 연구』(소명출판)를 펴내었다. 『비평과 전망』『시경』『작가세계』의 편집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